영화♡음악
Parade of the Charioteers / Miklos Rozsa 벤 허 [Ben Hur. 1959] -3 결전의 날은 밝아왔다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아테네, 시리아등을 대표하는 각 지방 출전자들 9명의 경주가 시작된다.물론 우승 후보자는 화려한 경력으로 로마를 대표하는 멧살라. 경주가 시작되고...사납게 생긴 흑마들이 이끄는 전차 바퀴 바깥쪽에다 날카로운 쇳조각을 붙여 경쟁자들의 전차 바퀴를 망가뜨리고, 또 악랄하게 채찍을 벤허에게 마구 휘두르는 멧살라. 다른 경쟁자의 전차 몇대를 망가뜨리고나서 벤허에게 바짝 붙여 전차 바퀴에 손상을 가하고, 채찍으로 벤허를 계속 후려친다. 마침 벤허가 그 채찍의 끝을 잡게 되어 혼신의 힘을 다해 당긴다. 그러자, 오히려 자기 자신이 전차에서 떨어져 뒤에 오던 다른 출전자의 말발꿉에 짓밟히고, 바퀴에 깔려 온몸이 짓이겨지는 중상을 입게 된다. 벤허는 이 경주의 우승으로 단번에 유대인들의 영웅이 된다. 중상을 입은 멧살라를 찾아간 벤허. 멧살라는 벤허에게 어머니와 동생의 소식을 알려주고는죽어가면서도 벤허에게 도전적인 말을 한다. "It goes on, Judah. The race... The race is not over."(계속된다, 쥬다. 경주는... 경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한걸음에 나환자촌 계곡을 찾은 벤허는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인다.며칠 후, 벤허는 에스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곡으로 가서 어머니와 누이를 안고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는다. 벤허는, 예수가 기적을 행한다는 에스더의 말을 듣고 에스더와 함께 예수가 있다는 곳을 찾아가다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목격한다. 벤허는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예수에게 물을 떠다주려다가, 예수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노예로 팔려가던 중에 나자렛에서 자신에게 물을 떠주었던 사람임을 알고 놀란다. 뒤를 따라간 벤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을 지켜보며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듣는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숨진 시각. 갑자기 세상이 온통 암흑천지가 되고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쏟아진다. 그 비를 맞고 순식간에 나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얻은 어머니와 여동생은 집으로 돌아온 벤허와 기쁜 눈물의 포옹을 나눈다. 벤허는 에스더에게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며, 비로소 자기의 마음속에서 복수심이 사라졌음을 말한다. ■ 영화 해설 ■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제작비인 1,500만 달러를 투입, 10년의 제작 기간과 10만명의 출연 인원, 1년여 촬영 기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로 필름을 소모했다. 대사가 한 마디 이상인 등장 인물만도 496명, 하이라이트인 15분간의 전차 경주 장면을 위해 1만 5천명이 4개월간 연습했다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다. 아카데미에서 무려 11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해상전과 전차 경주장면은 영화사에 빛나는 명장면이자 압권이다. 원작자는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터키 대사를 지낸 바 있는 Lew Wallace 루 월레스. 1880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곧 무대에 올려져 대성공을 거두었고, 1925년 프레드 니블로 감독의 무성영화 (벤허)가 발표됐다. 1,500만 달러라는, 당시로는 천문학적 제작비를 놓고, 그 많은 돈을 들이고도 제작비를 회수하고 수익을 낼 수가 있을까라는 의견이 분분했었다. 1958년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벤허"의 촬영이 시작됐을 때 제작사인 MGM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대단한 흥행을 기대했던 뮤지컬 <Gigi 지지>가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벤허>의 제작은 MGM社의 파산을 예고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MGM도 이만한 도박을 시작할 때는 믿는 바가 있었다. 흑백무성영화를 리메이크해서 짭짤한 재미를 봤던 MGM은 그들이 1925년에 만들었던 <벤허>를 컬러판 와이드스크린에 부활시킬 수만 있다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 분석했다. 프레드 니블로가 연출한 오리지널 <벤허>는 당시 제작비 400만 달러의 몫을 톡톡히 해냈다. MGM은 1951년 "Mervyn LeRoy 머빈 르로이"가 연출한 <QUO VADIS (쿼바디스, 1951)>의 성공사례에도 주목했다. 제작비 850만 달러를 들인 이 작품은 1,250만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벤허>의 프로듀서 "Sam Zimbalist 샘 짐발리스트"는 이탈리아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쿼바디스>를 찍은 경험이 있는 제작자였고, 그는 <쿼바디스>에 사용된 시설, 세트, 의상을 <벤허>의 촬영에 재활용하는 한편, 필요한 인력 역시 <쿼바디스> 제작진에서 끌어들였는데, 영화음악을 맡은 "Miklos Rosza 미클로스 로짜", 촬영의 로버트 서티스, 세트 디자이너 윌리엄 호닝과 에드워드 카르파그노가 그들이다. 주인공 쥬다 벤허 역에 "Charlton Heston 찰턴 헤스턴"만한 배우는 없었다. 그는 "Cecil B. DeMille 세실 B.드밀" 감독의 1956년작 <THE TEN COMMANDANTS (十 誡, 1956)>에서 모우지스로 출연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십계>는 당시 <Gone With The Wind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 다음 가는 흥행수익을 기록한 작품으로, 찰턴 헤스턴은 서사극의 영웅이 견지해야 할 강인한 육체, 불굴의 의지, 근엄한 아버지 이미지 등을 고루 갖춘 적임자였다. 그는 서부영화에서 존 웨인이 했던 임무를 서사극에서 수행했고, 많은 영화에서 가부장제와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감독 윌리엄 와일러는 <Mrs. Miniver (미니버 부인, 1942)>과 <The Best Years of Our Lives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탄 인물이었지만, 스펙타클한 서사극 분야에선 신인이나 다름없었다. 후대의 평가는 영화 <벤허>에서의 감독의 공은 그리 크지 않다는 쪽이다. 해전과 전차경주로 대변되는 놀라운 스펙타클이 사실은 제2 제작진 연출자였던 앤드루 마튼과 야키마 가누트의 작품이라는 것. 심지어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오, 신이시여, 과연 이게 내가 만든 작품입니까?"라고 했다던 윌리엄 와일러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벤허>가 갖는 의미를 줄이려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1959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윌리암 와일러), 남우주연상 (찰턴 헤스턴), 남우조연상 (휴 그리피스_일더림 역), 촬영상 (로버트 L. 서티스), 미술상 (윌리암 호닝 외 2명), 녹음상 (MGM 녹음 스튜디오), 음악상 (미클로스 로짜), 특수효과상 (아놀드 길레스피 외 2명), 의상디자인상 (엘리자베스 하펜든), 편집상 (랄프 윈터스 외 1명) 등 모두 11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이 기록은 <TITANIC (타이타닉, 1997)> 및 <The LORD of The RINGs: The RETURN of The KING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2003)>의 11개 부문 수상 기록과 타이를 이루고 있다.
Parade of the Charioteers / Miklos Rozsa
벤 허 [Ben Hur. 1959] -3
결전의 날은 밝아왔다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아테네, 시리아등을 대표하는 각 지방 출전자들 9명의 경주가 시작된다.물론 우승 후보자는 화려한 경력으로 로마를 대표하는 멧살라.
경주가 시작되고...사납게 생긴 흑마들이 이끄는 전차 바퀴 바깥쪽에다 날카로운 쇳조각을 붙여 경쟁자들의 전차 바퀴를 망가뜨리고, 또 악랄하게 채찍을 벤허에게 마구 휘두르는 멧살라.
다른 경쟁자의 전차 몇대를 망가뜨리고나서
벤허에게 바짝 붙여 전차 바퀴에 손상을 가하고,
채찍으로 벤허를 계속 후려친다.
마침 벤허가 그 채찍의 끝을 잡게 되어
혼신의 힘을 다해 당긴다.
그러자, 오히려 자기 자신이 전차에서 떨어져
뒤에 오던 다른 출전자의 말발꿉에 짓밟히고, 바퀴에 깔려 온몸이 짓이겨지는 중상을 입게 된다.
벤허는 이 경주의 우승으로 단번에 유대인들의 영웅이 된다.
중상을 입은 멧살라를 찾아간 벤허.
멧살라는 벤허에게 어머니와 동생의 소식을 알려주고는죽어가면서도 벤허에게 도전적인 말을 한다.
"It goes on, Judah. The race... The race is not over."(계속된다, 쥬다. 경주는... 경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어.)
한걸음에 나환자촌 계곡을 찾은 벤허는 분노와 절망감에 휩싸인다.며칠 후, 벤허는 에스더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곡으로 가서 어머니와 누이를 안고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는다.
벤허는, 예수가 기적을 행한다는 에스더의 말을 듣고
에스더와 함께 예수가 있다는 곳을 찾아가다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를 목격한다.
벤허는 십자가를 지고 올라가는 예수에게 물을 떠다주려다가,
예수의 얼굴을 보고... 자신이 노예로 팔려가던 중에 나자렛에서 자신에게 물을 떠주었던 사람임을 알고 놀란다.
뒤를 따라간 벤허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순간을 지켜보며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듣는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숨진 시각. 갑자기 세상이 온통 암흑천지가 되고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쏟아진다.
그 비를 맞고 순식간에 나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얻은 어머니와 여동생은 집으로 돌아온 벤허와 기쁜 눈물의 포옹을 나눈다.
벤허는 에스더에게 예수의 마지막 말씀을 전하며, 비로소 자기의 마음속에서 복수심이 사라졌음을 말한다.
■ 영화 해설 ■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제작비인 1,500만 달러를 투입, 10년의 제작 기간과 10만명의 출연 인원, 1년여 촬영 기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고도 남을 정도로 필름을 소모했다.
대사가 한 마디 이상인 등장 인물만도 496명, 하이라이트인 15분간의 전차 경주 장면을 위해 1만 5천명이 4개월간 연습했다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겼다.
아카데미에서 무려 11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해상전과 전차 경주장면은 영화사에 빛나는 명장면이자 압권이다.
원작자는 남북전쟁의 영웅이며 터키 대사를 지낸 바 있는 Lew Wallace 루 월레스. 1880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곧 무대에 올려져 대성공을 거두었고, 1925년 프레드 니블로 감독의 무성영화 (벤허)가 발표됐다.
1,500만 달러라는, 당시로는 천문학적 제작비를 놓고, 그 많은 돈을 들이고도 제작비를 회수하고 수익을 낼 수가 있을까라는 의견이 분분했었다.
1958년 로마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벤허"의 촬영이 시작됐을 때 제작사인 MGM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대단한 흥행을 기대했던 뮤지컬 <Gigi 지지>가 기대에 못 미치는 결과를 초래하면서 <벤허>의 제작은 MGM社의 파산을 예고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MGM도 이만한 도박을 시작할 때는 믿는 바가 있었다. 흑백무성영화를 리메이크해서 짭짤한 재미를 봤던 MGM은 그들이 1925년에 만들었던 <벤허>를 컬러판 와이드스크린에 부활시킬 수만 있다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 분석했다.
프레드 니블로가 연출한 오리지널 <벤허>는 당시 제작비 400만 달러의 몫을 톡톡히 해냈다.
MGM은 1951년 "Mervyn LeRoy 머빈 르로이"가 연출한 <QUO VADIS (쿼바디스, 1951)>의 성공사례에도 주목했다. 제작비 850만 달러를 들인 이 작품은 1,250만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였다.
<벤허>의 프로듀서 "Sam Zimbalist 샘 짐발리스트"는 이탈리아의 치네치타 스튜디오에서 <쿼바디스>를 찍은 경험이 있는 제작자였고,
그는 <쿼바디스>에 사용된 시설, 세트, 의상을 <벤허>의 촬영에 재활용하는 한편, 필요한 인력 역시 <쿼바디스> 제작진에서 끌어들였는데, 영화음악을 맡은 "Miklos Rosza 미클로스 로짜", 촬영의 로버트 서티스, 세트 디자이너 윌리엄 호닝과 에드워드 카르파그노가 그들이다.
주인공 쥬다 벤허 역에 "Charlton Heston 찰턴 헤스턴"만한
배우는 없었다.
그는 "Cecil B. DeMille 세실 B.드밀" 감독의 1956년작 <THE TEN COMMANDANTS (十 誡, 1956)>에서 모우지스로
출연하여 호평을 받은 바 있었다.
<십계>는 당시 <Gone With The Wind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1939)> 다음 가는 흥행수익을 기록한 작품으로, 찰턴 헤스턴은 서사극의 영웅이 견지해야 할 강인한 육체, 불굴의 의지, 근엄한 아버지 이미지 등을 고루 갖춘 적임자였다.
그는 서부영화에서 존 웨인이 했던 임무를 서사극에서 수행했고, 많은 영화에서 가부장제와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감독 윌리엄 와일러는 <Mrs. Miniver (미니버 부인, 1942)>과 <The Best Years of Our Lives (우리 생애 최고의 해, 1946)>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두 번이나 탄 인물이었지만, 스펙타클한 서사극 분야에선 신인이나 다름없었다.
후대의 평가는 영화 <벤허>에서의 감독의 공은 그리 크지 않다는 쪽이다.
해전과 전차경주로 대변되는 놀라운 스펙타클이 사실은 제2 제작진 연출자였던 앤드루 마튼과 야키마 가누트의 작품이라는 것.
심지어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오, 신이시여, 과연 이게 내가 만든 작품입니까?"라고 했다던 윌리엄 와일러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벤허>가 갖는 의미를 줄이려 노력했다고 전해진다.
1959년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윌리암 와일러), 남우주연상 (찰턴 헤스턴), 남우조연상 (휴 그리피스_일더림 역), 촬영상 (로버트 L. 서티스), 미술상 (윌리암 호닝 외 2명), 녹음상 (MGM 녹음 스튜디오), 음악상 (미클로스 로짜), 특수효과상 (아놀드 길레스피 외 2명), 의상디자인상 (엘리자베스 하펜든), 편집상 (랄프 윈터스 외 1명) 등 모두 11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이 기록은 <TITANIC (타이타닉, 1997)> 및 <The LORD of The RINGs: The RETURN of The KING (반지의 제왕 - 왕의 귀환, 2003)>의 11개 부문 수상 기록과 타이를 이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