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음악

"영화광" 비난 유감 (여유시간이 충분하신 분만 보세요)

뛰노라면 2010. 1. 27. 14:03

 

 


 

 
'영화광' 비난 유감

글 : 이헌익 (전 중앙일보 편집위원)

나는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불치의 버릇 하나를
어쩌지 못한다. 술이라도 한잔 곁들여 영화와 관련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보면 어느새 내 입에서
튀어나오는 고정 레퍼토리 때문이다.
나는 영화 이야기에 신이 나서 그러지만 어떤 땐 상대방이
“아니, 이 친구가 나를 떠보나” 하며 오해하기도 한다.




"거 왜, 서부영화 「황야의 7인」 있잖아”.

이렇게 운을 떼면 상대방이 30대라면 “아 저도
그 영화에 대해 들어봤어요” 하며 나오고,
50대에 가깝거나 그 이상이면 “있지. 율 브린너 주연” 하며
반색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7인의 배우가 누구누구인지 아나” 이게 그 버릇이다.

“어디 보자. 율 브린너, 스티브 맥퀸, 찰스 브론슨. 또 누가 있나
`… 아! 제임스 코번 그리고 ….”

이쯤 되면 나의 회심의 미소는 만면의 웃음으로 확대된다.

“잘 들어봐. 율 브린너, 스티브 맥퀸, 찰스 브론슨.
손가락 좀 꼽아 봐라. 그래. 제임스 코번, 로버트 본,
홀스트 복흐홀츠, 브래드 덱스터. 이자들이
‘황야의 7인’이지.”

“햐, 그걸 다 외우네. 너무 폼잡지 마라.
인터넷 세상에 클릭 한번 하면 다 나오는 걸 가지고.”

“아니지. 부모, 형제 이름은 물론이고 친구들 이름을
종이에 써가며 외우나 이치가 같은거라고.”

“그러면 감독은 누구냐`?”

“존 스타제스. 「OK 목장의 결투」 감독 아니냐.
버트 랭카스터가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로,
커크 더글라스가 폐병 걸린 총잡이 의사 닥 홀러데이로 나오지.
같은 소재로 먼저 나온 존 포드 감독의 「황야의 결투」에서는
헨리 폰다하고 빅터 마추어가 짝이고.”

“그러셔. 그럼 7인하고 맞붙는 멕시코 마적떼의 두목이
누구인지도 아냐`?”

“엘라이 월락크 아니냐” 하는 순간 아까부터 내 머릿속을
울려대던 엘머 번스타인의 주제곡과 함께 「황야의 7인」의
온갖 장면들이 눈앞을 스쳐가고, 나는 도리없이 예의
좌충우돌하는 장광설에 빠져들고 만다.

“거 손뼉 한번 쳐봐라.”

“손뼉은 왜?”

“영화에서 왜 애송이 홀스트 복흐홀츠가 멕시코 도둑놈들을
잡으러 가는데 자기도 좀 끼워달라고 율 브린너를 찾아오지 않나.
율 브린너가 보니까 어린 놈이 총잡이 세계의 고달픔도
모르면서 영웅심만 있는 게 한심하거든.
그래서 두 팔을 벌렸다가 손뼉을 치라고 시키지.

이놈이 멀뚱하게 있다가 시키는 대로 손뼉을 치는데
두 손바닥이 닿기도 전에 율 브린너의 권총이
양손 사이에 와 있는 거라.

총을 뽑는 솜씨가 엄청나게 빠른 거 아니냐.
그래 놓고 이번엔 네가 해봐라 하며 율 브린너가 손뼉을 치니까
어린 놈이 얼굴이 벌개가지고 뛰쳐나가는 장면 기억 안 나냐.
거 손뼉 한번 쳐봐라. 나도 한번 끼워보자.

 



그리고 말야 율 브린너하고 「베라크루스」의 게리 쿠퍼,
「셰인」의 아란 랏드, 「와록크」의 리처드 위드마크
이치들이 붙으면 누가 빠르겠나 대답해 봐라.”

“이거 완전히 어린애하고 술 마시고 있는 거아냐.”

 

 

“엘라이 월라크, 거 능글능글한 친구지.
「더 굿 더 배드 디 어글리」(the Good the Bad the Ugly)에서
어글리 아니냐. 마지막 장면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하고
리 반 클리프하고 3자 대결을 할 때 제 총엔
총알이 없는 줄도 모르면서 인상을 팍팍 쓰던 친구잖아.

그런데 TV에서 이 영화를 틀어주는데, 제목이
「석양의 무법자」더라고. 한심해서 말이야.
「석양의 무법자」는 셀지오 레오네 감독하고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만든 마카로니 웨스턴 3부작 중
2편 제목이거든.

1편이 알다시피 「황야의 무법자」 원제로 「한 줌의 달러」
(a Fistful of Dollars)고, 촌놈들이 흥행에 성공해
신이 났는지 2편 원제는
「약간의 달러가 더 필요해」(For a Few Dollars More)란
말씀이야. 국내 개봉 제목도 엄연히 영화사의 사료인데,
그것도 모르고 아무렇게나 붙여대니 웃기는 거 아냐.

그럼 「더 굿…」의 제목은 뭐냐.
좀 촌스럽지만 ‘석양에 돌아오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스트우드 석양에 돌아오다’라고.
경우는 다르지만 마카로니 웨스턴이란 말도 그렇지,
서양에서는 스파게티 웨스턴이라고 해야 알아듣는다고.

그리고 말이야 69년 7월에 「석양에 돌아오다」가
단성사에 붙을 때, 같은 날 명보극장인가 어디선가 뭐가 붙었느냐.
바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도널드(돈) 시겔 감독의
현대물 「석양의 만하탄」인데, 두 극장의 선전 포인트가 뭔고하면
서부극쪽은 ‘이스트우드의 매력은 역시 황야에서’이고
현대물쪽은 ‘근대화한 서부극의 정수’라고 했다고.

야, 통찰력도 대단하지. 그후에 돈 시겔하고 이스트우드가
바로 서부극의 양식을 현대적으로 변용한
그 유명한 「더티 해리」 시리즈를 만들지 않았냐.

형사 해리가 서부의 보안관 와이어트 어프에다가
황야의 무법자를 플러스한 캐릭터 아니냐고.
그리고 선전 문구는 얼마나 순진무구한가.

물론 과장도 많고 감상도 많지만
‘6대 스타의 수폭(수소폭탄)적 위력’
‘황야 아득히 휘파람도 구성져’ 같은 카피를 보면
풍류가 있잖냐 말이야.
근데 요새 놈들은 모조리 잔대가리만 굴려가지고`….”

“야, 그만 시끄럽다. 내가 아는 이야기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지만 선생은 어째서 술자리를
걸핏하면 영화 이야기로 끌고 가나.

그리고 옛날 광고에 노상 등장하는 ‘인산인해’도 그렇고,
‘수폭적 위력’에 풍류라니, 그거 다 없던 시절에
쾅쾅 때리고 보자는 사대주의적 콤플렉스가 아니면 뭐냐.

풍류란 정신이 고상하게 고양돼서 세상의 악다구니로부터
좀 떨어져 있는 거라고 아는데,
너야말로 ‘석양의 무법자’처럼 아무데나 갖다 붙이나.
말하자면 지적 격이나 주체성이 없으면 허풍밖에 더 되나.”

상대방의 말에 조금 머쓱해졌지만
이미 브레이크가 파열된 내 말이 멈출 리가 없다.
독자들께서는 나의 이 젠체하는 장광설을 용서하시기 바란다.

영화 소비자로서 영화에 ‘미친’사람들의
한 방편적 예로 읽어주기를 바란다.
무엇에 미쳤다는 것이 거기에 대한 종교적 숭배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면 이 좌충우돌식 진술은
수준의 졸렬함에도 불구하고 영적 방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시끄럽기는 이 사람아. 영화를 좋아한다면서.
하여튼 아까 그 멕시코 마적떼 두목 엘라이 월라크 말이야
이 친구를 쳐부수러 스티브 맥퀸이 멕시코로 갔는데,
스티브 맥퀸이 암 때문에 죽었잖나.

그런데 맥퀸이 투병하면서 민간요법이라도 받겠다고 간 곳이
멕시코거든.
멕시코 농민들을 구한 사람이 나중에 멕시코에서 스러지다니
이 무슨 비극적 인연이냐고. 그 터프 가이가.”

“이 사람이 진짜 어린애네. 영화하고 현실이 왔다갔다하는구먼.”

“장자의 ‘나비의 꿈’ 같은 거 아냐. 장자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까 나비꿈을 꾼 사람이 진짜 나인지,
아니면 지금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건지
헷갈리더라는 이야기 말이야.

이제 이 세상에 없으니 본인한테
‘총잡이가 진짜 당신이요, 아니면 치료받던 사람이 진짜요’
하고 물어볼 수도 없고, 거 참.” 

 

 


“자꾸 떠들래. 한심해서 해주는 말인데,
그러면 「겟어웨이」에서 강도짓해서 턴 돈가방을 들고
현실에서나 「겟어웨이」에서나 양쪽 다 마누라인
알리 맥그로하고 바로 그 멕시코로 잠적한 스티브 맥퀸은
또 누구냐. 술이나 쳐라.”

“술? 「캣발루」에서 리 마빈이 주정뱅이 총잡이로 나오는데
그걸로 아카데미 주연상을 탔잖냐.
「몬테월슈」에서는 잭 파란스가 카우보이 노릇을 그만두고
술집을 차리지.
근대화에 밀린 카우보이들의 우수를 그린 영화인데,
그 영화에서 잭 파란스하고 제일 친한 친구가 리 마빈 아니냐.

‘더 굿 타임스 아 컴잉’(좋은 시절이 오리라)하고
마마 카스 엘리오트가, 거 왜 ‘캘리포니아 드리밍’을 부른
마마스 앤 파파스의 리드싱어가 주제가를 부를 때
코끝 찡하지.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
「프로페셔널 (1966)」에서는 마적떼 두목으로 잭 파란스가 나오고
그를 쫓는 전문가들 리더로 리 마빈이 나오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

“에라, 이 미친 놈아. 차라리 텍사스나 애리조나 같은 데서
태어나지 그랬냐. 지금이라도 이민가든가.”

“뭐. 너야말로 진짜로 영화와 현실을 구분 못하네.
지금 거기 누가 있냐. 「역마차」의 링고 킷드가 있냐,
수색자」의 이산 에드워즈가 있냐,
와이어트 어프나 닥 할러데이,
와이어트 어프를 사랑한 클레멘타인이 있냐, 와일드 빌이 있냐,
와일드 빌을 좋아한 여자 총잡이 칼라미티 제인이 있냐,
「셰인」의 셰인과 그의 친구가 된 조 스타레트가 있냐,
「황야의 7인」의 크리스가 있냐,
「내일을 향해 쏴라」의 선댄스 키드하고 부치 캐시디가
있기를 하나, 엘다 4형제가 있나.

그렇다고 「황야의 무법자」의 ‘이름없는 사나이’
(Man with No Name;클린트 이스트우드 역)가 있냐.
더군다나 스파게티 웨스턴은 스페인에서 촬영했네,
이 사람아.”

“그럼 네가 그 영화들 보러 다닐 때는 그 사람들이 있었냐.
또 지금 그 사람들이 있다면 찾아 갈래?
이거 내가 헷갈리네. 조선놈으로 태어나서 웬 서부영화 타령이냐.
정신 좀 차려라.”

“이런 답답한 친구가 있나. 내가 언제 간다고 그랬나.
그 영화들 보러 댕길 때는 60년대고 영화 속은 1800년대인데
가니 안가니 그게 말이 되냐.
그리고 와일드 빌이나 부치 캐시디 같은 몇 사람을 빼고
나머지 는 다 가공의 인물인데 타임 머신이 있다 한들
가봐야 있냐고.”

“야야 그만 일어서자. 너는 아예
「백 투 더 퓨처」 투인가 스리인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낫겠다.
그 영화 보니까 타임 머신을 타고 모뉴먼트 밸리로 가더라.”

“애리조나의 모뉴먼트 밸리? 거 좋지.
‘존 포드즈 뷰’(John Ford’s View)라.
광활한 푸른 하늘, 새털구름, 완벽한 정적 속에서
풍화돼 가는 어마어마한 바위산들,
붉은 평원, 그 사이를 점점이 지나가는
보안관과 무법자와 개척민과 인디언들.

한마디로 신화의 공간 아니냐.
서부의 아이콘 아니냐고. 요새는 맥주광고 필름을 찍으려고도
거기로 가는 모양이던데
나는 아직도 못 가봤으니. 맥주나 두어 병 더하자.”

“가자고 이 사람아. 맥주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신화의 아이콘이라고 해봤자 뭐 그리 대수냐.
서부 무대라는 게 기껏해야 남북전쟁 전후부터 20세기 초입까지
50년 정도 인데 그 안에 무슨 신화가 그리 많겠나.

알량한 영웅사관이나 공동체 설립, 개척 정신,
청교도 기강 같은 거 그게 나쁜 건 아니지만
영화로는 다 우려서 팔아먹은 거 아니냐.

그 와중에 영화 안팎에서 인디언들만 작살내고.
그러면서 권선징악에 기대어 폭력 이데올로기를
신화로 조작해 전세계에 전파한 게 미국 서부영화 아니냐 말이지.
그런 점에선 마카로니 웨스턴이 오히려 솔직하지.
양아치끼리 양아치답게 붙잖냐.

어쨌든 더 파먹을 게 없으니까 저절로 사라진 게 웨스턴 장르인데
조선놈이 아직도 그걸 그리워하다니 정말 한심하다.
오늘날 미국영화의 폭력성은 서부영화에 뿌리를 두고 있어요,
이 인간아. 전세계에 그 사생아들이 퍼져 있고.
그리고 모뉴먼트 밸리가 뭐냐. 그냥 황무지 아니냐.

풀도 자라지않는 거기 가서 살 수 있냐.
그곳을 필름에 담으니까 관객들 감상(感傷)도 자극하고
그림도 폼나고 그래서 이 영화, 저 영화에서 쓴 거지.

너는 모뉴먼트 밸리를 황무지로 보지않고
신의 조각공원쯤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황무지에 대척되는 사람이 사는 곳을 보라고.
그 돌뎅이들이 서 있는 거지, 안 그래.
붉은 땅 붉은 땅 하는데 강진·해남은 가봤냐.”

“자네는 어째서 영화를 그 따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나.
끝없는 지평선, 하늘에 가득한 노을, 말 달리는 사나이들,
마이 네임 이즈 노바디(My name is nobody),
방랑의 휘파람, 안녕 내 사랑 클레멘타인.
자유나 용기 같은 게 느껴지지 않나.

‘죽이지 않으면 죽기때문에 총질하고,
돌밭 갈아 농사지어야 하는데 자유같은 소리 하고 있네’
하지 마라. 영화 아니냐. 허구라고.
예나 지금이나 아이가 정의의 건맨 꿈을 안 꾸면
그게 어디 아이냐.

그러다 철들면 영화 같은 걸로 다시 씹어보고 버리지.
그게 카타르시스 아니냐. 그건 그렇고
인디언에 관한 것도 존 웨인의 「역마차」나 「아파치 요새」하고
「작은 거인」 「늑대와 춤을」 같은 거하고 비교하면
그런대로 달라졌지 뭐.



영화는 꽝이지만 피터 스트라우스하고 캔디스 버겐 나오는
「솔저 블루」에서도 인디언 학살 장면을 생생하게 그렸고.
야 그런데 「작은 거인」을 몇년 전에 다시 보니까
개봉 당시엔 영화 속에서 100살도 더 먹은 더스틴 호프만 분장을
기가 막히게 했다고 화제가 아니었나.
그게 외계인 같더라고.

분장술도 엄청나게 발전했지.
「작은 거인」은 리얼리즘이 약한 대신 아이러니가 좋았어.
진짜 심플, 진실한 건 인디언들 이름이고.
「늑대와 춤을」 봐라. ‘발로 차는 새’ ‘열마리의 곰’
‘머릿속의 바람’ ‘두 손 쥐고 일어서’…
두 손 그러니까 또 생각나네.
손뼉 한번 쳐봐라. 총 좀 뽑자.”

“쇼를 해라. 술다 떨어졌다.”

“인디언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아까 하던
스티브 맥퀸 이야기나 마저 하고 끝내자.”

"너 스티브 맥퀸이 인디언 혼혈로 나오는
「네바다 스미스」 이야기하려고 그러지.”



“하 이 사람 영화 좋아하기는. 거장 헨리 하사웨이가
연출한 거지. 거기 나오는 주요배우들 다 대봐라.”

“너는 죽어도 그 병은 못 고치겠구나. 알아도 모른다.”

“잘 들어봐라. 스티브 맥퀸이 자기 부모를 죽인
악당 세 놈을 추적하는데 찾아낸 순서대로 보면
마틴 랜도, 아서 케네디, 칼 말덴이고
그 이전에 황야에서 만나 총 쓰는 법을 배운 사람은
브라이언 키스 아니냐.

맥퀸이 다른 악당들한테 린치당할 때 구해준 신부는
라프 발로네고, 맥퀸이 탈옥할 때 도와준 여자는
수잔 프레세트거든. 호화 캐스트지.
그래도 호화 캐스트로는 「서부개척사」따라갈
서부영화는 없지만서도.

그런데 말이야, 스티브 맥퀸의 극중 이름이 뭔지 아냐.
맥스 샌드라고. 맥퀸이 네바다 스미스라는 가명으로
칼 말덴 일당에 위장 잠입했는데,
칼 말덴이 영 맥퀸이 의심스럽거든.
그래 제딴에는 맥퀸이 방심한 틈을 탄다면서
뒤통수에다 대고 ‘맥스’하고 부르는데 긴장되데.

자네 돌아앉아 봐라.
이름 한번 불러보자. 자네는 자연스럽게 스티브 맥퀸이 되니
좀 좋으냐.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운명이냐.
맥퀸 영화 중에 「산 파블로」가 있는데
원제가 「샌드 페블스」거든. 그러니까
그 샌드하고 이 샌드가 ….”

“내가 웃고 만다. 그 꿈마저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겠냐.
안그래도 사는 재미가 없는 놈한테.
자 돌아앉았다, 됐냐. 돌아앉은 김에 바로 일어서서 나갈란다.
잘 있어라.” 

 

 

 

 “알았다, 알았어, 이 사람아. 「황야의 7인」으로 시작했으니
그걸로 끝내야 되지 않겠나.
아까 악당 중에 아서 케네디가 있었잖냐.
케네디 하면 배우 중에는 그래도 조지 케네디 아니냐.
이 친구가 제임스 위트모어란 배우하고 똑같은 소재로 만들었는데,

하기야 원작이 구로사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이기는 하지만
완전히 폭력영화라 김샜다는 거 아니냐.


어 이 사람 진짜 가네.
율 브린너의 「황야의 7인」 2편도 있고
아직 「와일드 번치」에 「옛날 옛적 서부에서」부터
몽고메리 우드, 페르난도 산초, 프랑코 네로, 테렌스 힐 같은
싸구려까지 엄청나게 많은데. 이거 큰일났네.”

“그런 게 큰일이라고 그러니 자네가 실속이 없지.
그런 껍데기만 잔뜩 알고 있으면 뭐하나.
계속하려면 혼자 벽을 상대로 해라.”

“나 참 이 사람. 그러니까 취미 아닌가. 진짜 취미란 시시콜콜한 걸
누가 더 알고 있느냐 하는 유희 아닌가.
오늘이야 서부영화에 빗대어 취미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 거고,
그러지말고 저기 포장마차 가서 깊이있는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휘적휘적 걷는 모습이... 꼭 헨리 폰다같은 친구야.”


관훈저널 2000년 여름 통권75호(제40권 제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