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동파(蘇東坡)
그는 서기 1037년 1월 8일
북송(北宋) 인종(仁宗) 때 쓰촨 성(四川省) 메이산 즉 미산(眉山) 근교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된다.
서기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蘇洵)은 두 아들 소식(蘇軾)과 소철(蘇轍)를 데리고 상경(上京)하여 이들의 詩를
당대의 대 시인이며 고관대작이었던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자 격찬을 받는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는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도 나란히 합격했지만 때 마침 모친상을 당하자 벼슬자리를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항저우(抗州) 서호변의 소동파 석상)
서기 1060년 상(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 즉 개봉(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나란히 합격했으며,
이어 동파는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개봉(開封)에 남게 된 동생 소철(蘇轍)과 헤어져 홀로 임지로 떠난다.
봉상부 즉 서안(西安)은 서주(西周:기원전 11세기 경으로 지금부터 3,000년 전의 옛 주왕조를 이른다.)
이래 많은 문화유적이 남아있는 유서깊은 곳이다.
그는 공자묘(孔子墓)의 석고(石鼓:고대문자를 새긴 10개의 북 모양의 돌)와
개원사(開元寺) 동탑(東塔)에 남아 있는 당대 왕유(王維)와 오도현(吳道玄)의 불화(佛畵) 등을 접한 감회를
봉상팔관(鳳翔八觀)이란 책에서 자세히 풀어놓은것으로 보아
고문(古文)과 회화(繪畵)에 대단한 조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상부(鳳翔府)에서의 임기가 끝나 상경한 서기 1065년에 부인 왕씨(王氏)가 병을 얻어 죽었고.
이듬해 아버지 소순(蘇洵)마저 병으로 죽자, 동파는 아버지의 관을 고향으로 옴겨가 상(喪)을 치렀으며
3년상을 탈상(脫喪)하고 상경한다. 그 해에는 신종(神宗)이 즉위한 해로,
참지정사(參知政事)의 고위직에 있던 왕안석(王安石)을 중심으로한 개혁파가 득세하여
중앙정부의 물자조달을 합리화하기 위해 균륜법(均輪法)을 만들어 시행했고,
가난한 농촌에 저리로 자금을 빌려줘 농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청묘법(靑苗法)등
당시로써는 대단히 파격적 법률인 이른바 신법(新法)을 제정하여 시행하던 시기였다.
(항저우(抗州)의 시후(西湖)풍경, 2년 전에 항주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인데,
지금도 아름다운 서호풍경이 눈에 선 하다.)
신법(新法)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던 소동파는
조정의 눈총을 받아 감관고원(監官告院)이라는 지극히
사무적인 업무만을 담당하는 별 볼 일 없는 직책으로 발령이 나자,
화딱지가 난 그는
지방 근무를 자청하여 절강성(浙江省) 항저우(杭州)에서 자사로 근무할 것을 상주(上奏) 했고,
눈에 가시로 여겼던 조정은 흔쾌히 발령을 내려 항주로 그를 내려보낸다.
바로 이때 항주의 유명한 호수인 서호(西湖)의 제방을 그의 지시로 새로 쌓았는데,
소동파가 쌓다고 하여 "소제(蘇堤)"라 이름이 붙은 제방이 지금도 소동파의 석상과 함께
명승지로 남아 지난날을 기리고 있다.
이에 자세한 내용은 몇 년 전에 항저우 여행을 하며, 본 블로그에 소개 했던
"항저우... 서시(西施)를 닮은 호수(湖水) 서호(西湖)"에
대충 설명했던 관계로 여기선 생략코자 한다.
이어 그는 밀주(密州), 서주(徐州), 호주(湖州)등지를 돌며 지방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소동파가 쌓다고 하여 "소제(蘇堤)"라 이름이 붙은 제방인데 늘 이렇게 관광객들로 붐빈다.)
후저우 즉 호주(湖州)의 지사(知事)로 있던 서기 1079년에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詩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었고, 개봉으로 끌려가 뼈저린 고초를 겪었다.
이 사건이 이른바 소동파의 "필화사건(筆禍事件)"이다.
이 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烏臺詩案)이란 책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많은 고초를 겪었지만 다행히 사형(死刑)을 면한 그는
100일 간의 옥살이를 치르고 황주(黃州) 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 縣)의
단련부사(團練副使)라는 지방관으로 좌천 된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못하게 하며, 황주를 떠나면 안 되는 거주 이동의 자유를 박탈하면서 발령 낸 관직은
일종의 유배형(流配刑)에 해당되었다.
황주(黃州)에서의 생활은 매우 궁핍했다.
부인은 가난에 찌들리며 하루종일 누에고치로 실을 뽑아 옷감을 짜는 양잠일을 해야 했고,
동파는 군부대가 있던 자갈투성이의 병영터를 빌려 농사를 지으며 근근히 살아가야 했다.
이 땅을 그는 "동파(東坡)" 즉 "동쪽 언덕"이라 이름 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東坡居士)라고 칭 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의 대표적 명작으로 불리는 지금 소개코자 하는 "적벽부(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바로 이곳에서 였다.
서기 1085년 신종(神宗)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어린 철종을 뒤에서 조정하는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왕권과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것에 중점을 뒀으며
뤄양 즉 낙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王安石) 일파가 심혈을 기울여 만들고 시행한 개혁법인 신법(新法)들을 모조리 폐지해 버린다.
이러자 구법(舊法)을 신봉하던 소동파(蘇東坡)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거쳐,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중요 요직에까지 오른다.
그러나 사마광(司馬光)의 신법 폐지가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던 모역법(募役法)까지 폐지하는 등 너무 과격해지자,
소동파는 때 마침 지방관직을 마치고 상경한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그에 대한 강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몇 년 후 사마광이 죽자 당쟁이 다시 불붙었고, 섭정을 하던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비로서 철종이 자신의 소신을 가지고 펼친 정치, 친정(親政)이 비로소 시작된다.
철종은 할머니가 섭정 당시 패지시켰던 신법들을 모조리 부활시켰으며,
구법파인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는 운명에 처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강등 된다.
철종은 소동파에 대한 탄압을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주변 정치인들의 모함까지 들끓자,
소동파를 하이난 도 즉 중국 남쪽 끄트머리 섬인 배트남 근처의 해남도(海南島)로 유배을 보낸다.
소동파는 하루 한 번 이상 세차게 소낙비가 퍼붓는 습한 기후와 풍토병에 시달렸으며,
들짐승과 다름없던 그곳의 원시부족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7년 간이나 이어간다.
그는 무지하고 목매한 그들에게 농사짓는 법과 글자를 가르치고 문화생활의 편리성을 알려주며,
원시의 때를 벗겼던 해남도(海南島)의 진정한 선구자요 큰 스승이였다.
중국 남단 배트난 근처의 제주도보다 열배나 큰 섬인 하이난도(海南島)는
지금은 옛 모습은 사라진지 오래이고 개벽에 가까운 꿈의 휴양지로 탈바꿈 했다.
그가 머물던 곳에는
소동파의 발자취가 짙게 남아 그를 존경하며 기리는
유적과 공덕비들이 여럿 세워져 있다.
아무튼...
세월이 흘러 7년만에 철종이 죽고, 휘종(徽宗)이 뒤이어 즉위하면서 유배에서 풀려난 그는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고 하는 명예직에 불과하지만 벼슬자리에 봉해져,
수도인 카이펑 즉 개봉(開封)으로 돌아오던 도중에
노쇄한 몸에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안타까운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때 소동파의 나이가 66세였다.
- 주(註) -
소동파(蘇東坡)는
송시(宋詩)의 성문격(成文格)을 확립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大 詩人이었을 뿐만 아니라,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드는 명사(名士) 중 한 명으로,
당대(當代)를 풍미한 대 문장가(大 文章家) 였고,
중국문학사에 처음으로 호방사(豪放詞)를 개척한 호방파의 대표 사인(詞人)이기도 했다.
또한 북송시대 뛰어난 네 명의 서예가(書藝家)를 칭하는 북송사대가(北宋四大家)의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대단한 서예가(書藝家)이기도 했으며,
문호주죽파(文湖州竹派)의 주요 구성원으로서
중국 문인화풍(文人畵風)을 확립한 뛰어난 화가(畵家)이기도 했고,
요리에도 심오한 조예가 깊은 미식가(味食家)이기도 했으니...
(소동파가 즐겨 먹었다는 동파육(東坡肉)으로 항주를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다)
모르는것과
못하는것이 없던 그는...
중세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르네상스시대를 풍미한 대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비견 되는
동양의 위대한 석학(碩學)이라고 불리는 걸출한 인물이다.
실 예로
항저우(杭州)에 가면 소동파가 즐겨 먹었다는데서 유래한 "동파육(東坡肉)"이란 돼지고기 찜이 유명한데,
돼지고기 통뱃살을 특유의 소스에 담가 대여섯 번을 쩌낸 요리로,
어찌나 부드러운지 젓가락만 대도 두부처럼 잘라지는
씹을 것이 거의 없는 항저우 대표요리다.
청나라의 강희황제가 즐겨 먹었던,
닭에 소스를 발라 연잎을 싸서 구어 낸 "거지닭" 요리와 함께
항주(杭州)를 대표하는 특급요리로 유명하다.
"당송8대가(唐宋八大家)"라 하여...
중국 당(唐)나라와 송(宋)나라 때 고문(古文)의 대가 여덟 명을 일컷는 말로.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구양수(歐陽脩), 왕안석(王安石), 증공(曾鞏),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등 여덜 명을 가리킨다.
바로 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소동파의 아버지 소순(蘇洵)과 동생 소철(蘇轍) 그리도 본인 소식(蘇軾)까지 삼부자가 들어있으니
동양 문학사(東洋 文學史)에 이보다 더 빛나는 명문가(名門家)가 세상 어디에 또 있겠는가~
지금 소개코자 하는 그의 대표작인 "적벽부(赤壁賦)"는 불후의 명작으로 불리며,
유형지인 황저우 즉 황주(黃州)에서 양쯔 강(揚子江)을 유람하며,
그 옛날 적벽대전(赤壁大戰)을 회상하고
人間 존재(存在)에 대한 깊은 사색을 표현한 글이다.
적벽의 아름다운 경치와 역사의 대비,그리고 자연과 일체화하려는
제물철학(齊物哲學:
그의 대표작으로 꼽는데 주저함이 없으며 지금까지도 널리 애송 되고 있는,
소동파의 대표작으로 이름 난 작품이다.
그 내용을 보면
황주(黃州)의 적벽(赤壁)에서 오(吳)나라 대도독 주유(周瑜)가, 유비의 군사 재갈 량(諸葛亮)의 절대적 지략을 이용해
20만도 체 안되는 병력으로,
기세등등한 위(魏)나라 조조(曹操)의 100만 대군을 대파한 적벽대전(赤壁大戰)을 회고하고 있다.
자신도 주유처럼 공적을 세우고 싶으나
정쟁에 휩쓸려 유배를 당한 자신의 딱한 처지를 한탄하는 기색도 역력하게 담겨 있다.
아울러 이 詩의 바탕에 흐르고 있는 감개(感慨)는 人生의 허망함도 짙게 배어 있고,
“고향으로 내 마음 달리나니”란 글에서의 고향(故國)은 소동파 자신의 고향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비유적으로는
옛 땅 즉 적벽의 전쟁터로 이해할 수도 있는데. 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다정한 그대”는 스물일곱의 나이에 죽어 고향에 묻힌 소동파의 첫 번째 아내 왕씨부인을 이른다고 볼 수도 있고.
후자의 뜻으로 해석할 경우 위세 당당했던 오나라의 대도독 주유(周瑜)의 일파로 해석할 수 있다.
한 잔의 술을 강물 속 달에게 부어 주는 그의 멋진 행위는
적벽에서 사라져간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추모와 존경심의 표현이면서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쓸쓸한 내면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나라의 판소리로도 자주 애창되는 "적벽가(赤壁歌)"는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曹操)가 허창으로 도망을 치다가 화룡도에서 관우(關羽)와 미주쳤지만,
지난날 전투에 패해 떠돌던 암울한 시절
조조에게서 받은 호의를 고맙게 여긴 관우가 조조를 죽이지 않고 놓아주는 대목을 중심으로 엮은 판소리로,
소동파의 적벽부가 판소리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도 있다.
적벽대전(赤壁大戰)은
손권은 강남(江南)의 대부분을, 유비는 파촉(巴蜀)지방을 차지해 중국 천하를 삼등분 하며
삼국의 균형을 이루는 계기가 됐던
삼국시대의 수도없이 많은 전투 중에서도 가장 큰 전투로 역사에 남았다.
(하이난도(海南島)에 있는 소동파를 기리는 사당, 유배지터에 지어졌다.)
소동파의 詩와 글들은 감동적이지만...
그가 바라보는 국제정치의 시각은 보수적이고 아주 냉혹했다.
그는 우리나라 즉 당시의 고려(高麗)와 별로 호의적인 입장이 아닌 적대적 입장을 취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다.
소동파는 당시 송나라 조정에 올린 상소문에서 고려를 견제하는 입장을 취했는데.
"논고려진봉장(論高麗進奉狀)"이란 상소문에서는
고려 사신들에 대해 이르길 “접대하는데 들어간 비용은 셀 수 없을 정도이고,
그들이 있는 곳마다 떠들썩해 관가나 민간 모두가 괴로워 했다.” 라며 송나라 측 부담과 민폐를 지적하고 나섰다.
그는 또한 “송나라 기밀이 고려를 통해 적국인 거란으로 흘러들어갈 우려가 크다”면서
고려와 교류 중단을 촉구하기도 했던 강경파였다.
물론 고려(高麗)의 사신들이 송(宋)나라에 가서 어떤 무레한 행동을 했길레 이런 상소문이 올라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시와 글을 흠모하는 사람들이
고려 말기부터 사대부가를 중심으로 상당히 많았지만,
그와 우리나라와의 인연은 영~ 별루였던게 댱시의 현실이었다.
(항주 서호변의 소동파 석상)
그는 또한 유배 중 지나는 곳곳에 글과 시를 남겼다.
그 중 유명한 고사성어(古事成語)를 낳은 詩 한 편을 짧게 소개코자 한다.
"너무나 깊고 유원하여 그 참된 면모를 알기 어렵다"는 뜻의
"여산진면목(廬山眞面目)"이라는 유명한 고사성어를 낳은 詩 "제서림벽(題西林壁)"은
여주로 유배지를 옮겨 가던 길에 여산을 본 감회를 서림사(西林寺) 벽에 써 놓은 것이었는데 시의 내용은 이렇다.
題西林壁(제서림벽): 서림사(西林寺) 벽에 적다.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가로로 보면 산줄기요 옆으로 보면 봉우리로다.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멀거나 가깝게, 높거나 낮게 보아도, 제각기 다른 모습이네.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여산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것은
只緣身在此山中(지연신재차산중): 이 몸이 이 산속에 있는 까닭이로다.
적벽부(赤壁賦)는
전 적벽부(前 赤壁賦)와 후 적벽부(後 赤壁賦)로 나뉜다.
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죄를 얻어 호북성의 황주(黃州)에 유배되어 있을 때, 1082년 가을 (음력 7월)과 겨울 (음력 10월)에
황저우 성(黃州 城) 밖의 적벽에서 배를 타고 노닐면서 지은 작품이다.
7월에 지은 것을 "전(前)적벽부"라 하고, 동년 10월에 지은 것을 "후(後)적벽부"라 한다.
먼저 전(前) 적벽부를 올리고 뒤이어 후(後) 적벽부를 올리고자 한다.
혹 미약한 부분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양해를 부탁드리는 바이다.
아울러 본 싸이트인 (다음 포털싸이트)에 저장 된
한자사전(漢子辭典)의 한문 양과 가지 수가 빈약하여 써 넣을 수가 없는 글자가 꽤나 많았다.
부득이 한글로 채워 넣은 점은 씁쓸할 따름이니 이 또한 아울러 양해를 구하고자 하는 바이다.
(해남도(海南島)의 해변, 천혜의 열대풍광을 자랑하며 동남아의 하와이로 불리는 멋진 섬이다.)
前 赤壁賦(전 적벽부)
壬戌之秋 七月旣望 蘇子與客 泛舟遊於赤壁之下. 淸風徐來 水波不興.
(임술지추 칠월기망 소자여객 범주유어적벽지하. 청풍서래 수파불흥.)
임술년 가을 7월 열 엿세날에 나 소동파는 찾아온 손과 배를 띄워 적벽(赤壁) 아래서 노닐세,
맑은 바람은 천천히 살랑이고, 물결은 잔잔 하더라.
擧酒屬客 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 少焉, 月出於東山之上 徘徊於斗牛之間. 白露橫江 水光接天
(거주촉객 송명월지시 가요조지장. 소언, 월출어동산지상 배회어두우지간. 백로횡강 수광접천)
자 ! 이술 한 잔 받으시게, 그대는 시경 동풍장의 달 밝은 시를 읊조리고,
나는 시경의 관저장 사랑의 노래 부르리니, 이윽고 조금 있으니,
동산에 달이 솟아 올라 북두 견우간에 서성일제,
흰 이슬 물안개는 강에 비끼고, 물빛은 하늘에 닿았더라.
縱一葦之所如 凌萬頃之茫然. 浩浩乎 如憑虛御風 而不知其所止.
(종일위지소여 능만경지망연. 호호호 여빙허어풍 이부지기소지.)
한 잎의 갈대 같은 배를 가는 대로 맡겨 두어,
일만 이랑의 아득한 물결을 헤치니, 넓고도 넓구나.
허공에 의지하여 바람을 탄듯하여 그칠 데를 알 수 없네.
飄飄乎 如遺世獨立 羽化而登仙 於是 飮酒樂甚 毆舷而歌之
(표표호 여유세독립 우화이등선 어시 음주락심 구현이가지)
바람은 훨훨 나부끼고, 인간 세상을 버리고 홀로 서서,
날개가 돋치어 신선(神仙)으로 돼 오르는 것 같더라.
이에 술을 마시고 흥취가 도도해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니,
歌曰: 桂棹兮蘭장 擊空明兮溯流光 渺渺兮予懷 望美人兮天一方.
(가왈: 계도혜난장 격공명혜소류광 묘묘혜여회 망미인혜천일방)
노래에 이르기를 "계수나무로 노를 깎고,
목련가지 다듬어 삿대로 삼아 물에 비친 달을 밀침이여,
흐르는 달빛을 거슬러 오르네. 아득한 내 생각이여,
미인(美人)을 하늘 한 쪽에서 바라보네.
客有吹洞簫者 倚歌而和之 其聲嗚嗚然 如怨如慕 如泣如訴
(객유취통소자 의가이화지 기성오오연 여원여모 여읍여소.)
손님 중에 퉁소를 부는 이 있어 노래를 따라 화답(和答)하니,
그 소리가 슬프고도 슬퍼 원망하는 듯 사모하는 듯, 우는 듯 하소연 하는 듯,
餘音요요 不絶如縷 舞幽壑之潛蚊 泣孤舟之釐婦. 蘇者 秋然正襟 危坐而問客曰 : 何爲其然也?
(여음요요 부절여루 무유학지잠문 읍고주지리부. 소자추연정금 위좌이문객왈 : 하위기연야?)
여음(餘音)이 가늘게 실같이 이어져 그윽한 골짜기의 물에 잠긴 교룡(蛟龍)을 춤추게하고
외로운 배를 의지해 살아가는 과부를 울게하네.
소자(蘇子)가 근심스레 옷깃을 바루고 곧추앉아 손에게 묻기를 "어찌 그러한가?" 하니,
客曰 : 月明星稀 烏鵲南飛 此非曹孟德之詩乎?
(객왈 : 월명성희 오작남비 차비조맹덕지시호?)
손님이 말하기를 "'달은 밝고 별은 성긴데, 까막까치가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것은
조맹덕(曹孟德:조조)의 시가 아닌가?
西望夏口 東望武昌 山川上繆 鬱乎蒼蒼. 此非孟德之困於周郞者乎?
(서망하구 동망무창 산천상무 울호창창. 차비맹덕지곤어주랑자호?)
서쪽으로 하구(夏口)를 바라보고 동쪽으로 무창(武昌)을 바라보니
산천(山川)이 서로 얽혀 빽빽하고 푸른데,
여기는 맹덕(孟德:조조)이 주랑(周郞:주유)에게 곤욕(困辱)을 치른 데가 아니던가?
方其破荊州 下江陵 順流於東也 축로千里 旌旗蔽空
(방기파형주 하강릉 순류어동야 축로천리 정기폐공)
바야흐로 형주(荊州)를 격파하고 강릉(江陵)으로 내려감에,
흐름을 따라 동으로 가니, 배는 천 리에 이어지고 깃발은 하늘을 가렸었네.
시酒臨江 橫삭賦詩 固一世之雄也 而今安在哉?
(시주임강 횡삭부시 고일세지웅야 이금안재재?)
술을 걸러서 강가에 가서 창을 비끼고 시를 읊으니
진실로 일세(一世)의 영웅(英雄)일 진데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況吾與子 漁樵於江渚之上 侶魚蝦而友미鹿
(황오여자 어초어강저지상 여어하이우미록)
하물며 나는 그대와 강가에서 고기 잡고 나무를 하며,
물고기와 새우를 짝하고 고라니와 사슴을 벗하고 있네.
賀一葉之扁舟 擧匏樽而相屬 寄부유於天地 渺滄海之一粟.
(하일엽지편주 거포준이상촉 기부유어천지 묘창해지일속.)
한 잎의 좁은 배를 타고서 술잔을 들어 서로 권하고,
하루살이 삶을 천지(天地)에 의지하니
아득히 넓은 바다의 한 알의 좁쌀알이구나.
哀吾生之須臾 羨長江之無窮 挾飛仙오遊 抱明月而長終 知不可乎驟得 託遺響於悲風
(애오생지수유 선장강지무궁 협비선오유 포명월이장종 지부가호취득 탁유향어비풍)
우리네 인생의 짧음을 슬퍼하고 장강(長江)의 끝없음을 부럽게 부러워하네.
나는 신선을 끼고서 즐겁게 노닐며, 밝은 달을 안고서 오래토록 하다가 마치는 것을,
불현듯 얻지 못할 것임을 알고, 여운을 슬픈 바람에 맡기네.
蘇者曰: 客亦知夫水與月乎?
(소자왈: 객역지부수여월호?)
소자 말하되 "손님꺼서도 대저 물과 달을 아시오 ?
逝者如斯, 而未嘗往也. 盈虛者如彼 而卒莫消長也.
(서자여사, 이미상왕야. 영허자여피 이졸막소장야.)
가는 것이 이와 같으나 일찍이 가지 않았으며,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으나 끝내 줄고 늘지 않으니,
蓋將自其變者而觀之 則天地曾不 能以一瞬
(개장자기변자이관지 칙천지증불 능이일순)
무릇 변하는 것에서 보면 천지도 한 순간일 수 밖에 없으며,
自其不變者而觀之 則物與我皆無盡也 而又何羨乎?
(자기불변자이관지 즉물여아개무진야 이우하선호?)
변하지 않는 것에서 보면 사물과 내가 모두 다함이 없으니 또 무엇을 부러워하리요?
且夫天地之間 物各有主 苟非吾之所有 雖一毫而莫取
(차부천지지간 물각유주 구비오지소유 수일호이막취)
또, 대저 천지 사이의 사물에는 제각기 주인이 있어,
진실로 나의 소유가 아니면 비록 한 터럭일지라도 가지지 말 것이나,
惟江上之淸風 與山間之明月 而得之而爲聲 目遇之而成色 取之無禁 用之不竭
(유강상지청풍 여산간지명월 이득지이위성 목우지이성색 취지무금 용지불갈)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간(山間)의 밝은 달은,
귀로 얻으면 소리가 되고 눈으로 만나면 빛을 이루어서,
이를 가져도 금할 이 없고, 이를 써도 다함이 없으니,
是造物者之無盡藏也 而吾與者之所共樂
(시조물자지무진장야 이오여자지공락)
이는 조물주(造物主)의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릴 바로다."
客喜而笑 洗盞更酌 肴核旣盡 杯盤狼藉 相與枕籍乎舟中 不知東方之旣白.
(객희이소 세잔갱작 효핵기진 배반낭자 상여침적호주중 부지동방지기백)
손님이 기뻐서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따르니,
고기와 과일 안주가 이미 다하고 술잔과 소반이 어지럽네.
배안에서 서로 함께 포개어 잠이드니, 동녘 하늘이 밝아 오는 줄도 몰랐네.
- 끝 -
(구이린(桂林)의 가마우지 낚시)
後 赤壁賦(후 적벽부)
是歲十月之望, 步自雪堂, 將歸於臨皐, 二客從予過黃泥之坂.
(시세시월지망, 보자설당, 장귀어림고, 이객종여과황니지판.)
그 해 시월 망일(望日)이었다.
설당(雪堂)에서 나와 임고정(臨皐亭)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는 두 사람의 객(客)과 함께 황니(黃泥) 고개를 넘고 있었다.
霜露旣降, 木葉盡脫, 人影在地, 仰見明月, 顧而樂之 行歌相答.
(상로기강, 목엽진탈, 인영재지, 앙견명월, 고이락지 행가상답.)
벌써 서리가 내려앉았고 나뭇잎은 모두 떨어져 있었다.
대지 위에 어른대는 사람의 그림자, 고개를 들어보니
둥그런 밝은 달! 주변를 둘러보다 문득 즐거워진 마음에 걸으며 노래를 부르니,
객(客)들도 함께 따라 불렀다.
已而歎曰: “有客無酒, 有酒無肴; 月白風淸, 如此良夜何.”
(이이탄왈: “유객무주, 유주무효; 명백풍청, 여차량야하.)
그러나 잠시 후 탄식이 흘러나왔다.
“귀한 손이 오셨건만 마실 술이 없구나! 마실 술은 있다하되 안주거리 없구나!
하얀 달에 맑은 바람, 이리도 좋은 밤을 어인 수로 보낼까나”
客曰: “今者薄暮, 擧網得魚, 巨口細鱗, 狀似松江之로 顧安所得酒乎?”
(객왈: “금자박모, 거망득어, 거구세린, 상사송강지로 고안소득주호?)
그러자 한 객(客)이 말하였다.
“오늘 어스름 저녁 무렵 그물을 올려보니 물고기가 잡혔더이다.
주둥아리 커다랗고 비늘은 잘디 잘은, 그 형태가 영락없이 송강(松江) 명물 농어와 닮았더이다.
헌데, 술은 어데 서 구한다지요?”
歸而謀諸婦, 婦曰:“我有斗酒, 藏之久矣, 以待子不時之須!” 於是, 휴酒與魚, 復游於赤壁之下.
(귀이모저부, 부왈:“아유두주, 장지구의, 이대자불시지수!” 어시, 휴주여어, 부유어적벽지하.)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상의해 보았다. 그러자 아내가 말했다.
“영감께서 불시에 필요할 때가 있지 싶어, 오래전에 술 한 말 숨겨둔 게 있지요.”
그리하여 술과 물고기를 가지고 다시 적벽 밑으로 유람을 나갔다.
江流有聲, 斷岸千尺; 山高月小, 水落石出; 曾日月之幾何, 而江山不可復識矣.
(강류유성, 단안천적; 산고월소, 수락석출; 증일월지기하, 이강산불가부식의.)
강물은 소리내어 흐르고 있었다. 절벽은 깍아 질러 천척(千尺) 높이로 솟아있었다.
까마득한 산에 하염없이 작은 달, 줄어든 강물에 드러난 바위들...
도대체 해와 달이 몇 번이나 바뀌었다고
이렇게 알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강산(江山)이 변한 걸까.
予乃攝衣而上, 履참巖, 披蒙茸, 踞虎豹, 登규龍, 攀栖골之危巢, 俯馮夷之幽宮; 蓋二客不能從焉.
(여내섭의이상, 리참암, 피몽용, 거호표, 등규룡, 반서골지위소, 부풍이지유궁; 개이객불능종언.)
나는 옷소매를 걷고 육지에 올라 가파른 바위를 타고 올라가며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지나갔다.
포효하는 호랑이 바위, 꿈틀대는 이무기 괴목(怪木)위에 걸터앉아 보기도 하였다.
이윽고 아찔한 나무 끝 송골매의 위험한 둥지 위에 기어올라가,
강속 어딘가 깊이 숨어있을 하백(河伯), 풍이(馮夷)의 용궁을 내려다보았는데,
두 객(客)은 나를 따라오지 못했다.
劃然長嘯, 草木震動, 山鳴谷應, 風起水涌, 予亦초然而悲, 肅然而恐, 凜乎其不可留也.
(획연장소, 초목진동, 산명곡응, 풍기수용, 여역초연이비, 숙연이공, 름호기불가류야.)
휘- 익, 길게 소리를 질러보았다. 초목이 부르르 떨자, 골짜기 안에 산의 울림이 맴돌더니
홀연 바람이 일어나고 물결마저 춤을 추었다. 나는 슬며시 슬퍼졌다.
문득 숙연해져 두려운 생각마저 들었다.
시릴 정도로 맑고 차가운 느낌에 더 이상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反而登舟, 放乎中流, 聽其所止而休焉. 時夜將半, 四顧寂寥.
(반이등주, 방호중류, 청기소지이휴언. 시야장반, 사고적료)
몸을 돌려 다시 배에 올랐다.
강 한복판에 배를 띄우고 파도가 치는 대로 물결이 멈추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때는 바야흐로 한 밤중, 사방을 둘러보아도 적막과 고요함뿐이었다.
適有孤鶴, 橫江東來, 翅如車輪, 玄裳縞衣, 알然長鳴, 掠予舟而西也.
(적유고학, 횡강동래, 시여차륜, 현상호의, 알연장명, 략여주이서야.)
그 때였다. 저 동녘에서 한 마리의 학(鶴)이 강을 가로질러 날아오고 있었다.
날개는 수레바퀴, 까만 치마에 하얀 상의를 걸친 듯...
꺼ㅡ 억, 길게 울더니 내가 탄 배를 스쳐지나 서쪽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須臾客去, 予亦就睡. 夢一道士, 羽衣翩僊, 過臨皐之下, 揖予而言曰: “赤壁之遊, 樂乎? ”
(수유객거, 여역취수. 몽일도사, 우의편선, 과림고지하, 읍여이언왈: “적벽지유, 락호? )
잠시 후, 객(客)들은 떠나가고 나는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다.
우의(羽衣) 도복(道服)을 입은 한 도사가 표표(飄飄)한 자태로 임고정 밑을 지나와서
홀연 읍(揖)을 하며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적벽의 노님이 즐거우셨소이까?”
問其姓名, 면而不答. “嗚呼噫희! 我知之矣, 疇昔之夜, 飛鳴而過我者, 非子也耶”
(문기성명, 면이부답 “오호희희! 아지의의, 주석지야, 비명이과아자, 비자야야 ")
그 이름을 물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하, 그렇구료! 이제 알겠소이다!
지난 밤에 길게 울며 내 옆을 스쳐 날아간 그 학(鶴)이 바로 그대가 아니시오?”
道士顧笑, 予亦驚悟. 開戶視之, 不見其處.
(도사고소, 여역경오 개문시지, 불견기처.)
도사가 고개 돌려 빙그레 웃었다. 나는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창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으나, 그는 종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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