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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절미의 유래 - 이괄의 난 ♣

뛰노라면 2012. 10. 8. 11:10

 

 



 

 

 

♣ 인절미의 유래 ♣


인절미의 유래를 살펴본다.
공주에서는 백제문화재 행사 때 인절미를 만드는 행사가 있다.
바로 그곳에서 인절미가 유래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인조 때에 이괄이라는 사람이 난을 일으켜서 수도 한양을 점령하였다.
이때 인조 임금은 한양을 피해서 공주의 공산성으로 피난을 갔다.
어느 날 임금님이 공주로 피난을 왔다는 소식을 들은 임씨 성을 가진 백성하나가
임금님의 시름을 덜어 드리면서 입맛을 돋우기 위해서 조그만 음식 보따리를 갖고 왔다.

성문을 지키는 병졸에게 말하기를 백성으로서 임금님에게 드릴 음식 떡을
조금해왔는데 임금님에게 대신 드려달라고 하였다.
병졸은 그 음식을 인조 임금님에게 갖고 가서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바쳤습니다.

인조 임금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 먹어보니 얼마나 쫄깃쫄깃하고 맛이 있든지
생전 처음 먹어본 음식의 맛에 놀라며 이름을 물었다.
하지만 그 병졸은 그 떡의 이름을 몰랐다.
그래서 이름은 모르고 다만 임씨 성을 가진 백성이 만들어온 떡인 줄 아뢰오하고
대답을 했다.
그 말을 들은 인조 임금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임서방이 절미한 떡이라
그렇다면 임절미라 하면 되겠구나 하였다 한다.
아주 경치가 좋으면 절경 이라고 한다.
맛이 워낙 뛰어난 것은 절미라고 하는 것인데 여기서 미는 쌀 미(米)를 사용하는 건지
아름다울 미(美)를 사용하는 건지 그것은 확실하지 않다.
그래서 그날부터 그 떡은 임절미가 되었으나 세월이 가면서 임이 인으로 변하여
인절미로 불리게 된 떡이 인절미다.


♣ 이괄의 난과 삼일천하 ♣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왕위에 앉힌 반정공신들은 모두 일등공신이 되었으나
이괄은 이등공신에 한성판윤을 주었다.
논공행상이 그 공평을 잃은 것이다.
얼마 후 다시 외직인 평안병사에 임명되자 이괄은 노골적인 불만을 표시하였다.
변방으로 내려 가 있던 이괄이 반란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자 조정에서는 이괄의
아들을 잡아 가두고 금부도사를 보내어 이괄을 잡아오도록 했다.
금부도사가 내려가자 이괄은 그 동안 자기 아들이 잡혔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부하 장병들을 모아놓고 토로하였다.
「 나에게는 자식이 하나 밖에 없소 그런데 그 아들을 잡아 가두고
나를 역적으로 몰아 금부도사가 잡으러왔소 나는 죽기를 각오하고 일어서려 하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수는 없소」

그의 부하 장병들은 이 말을 듣자 금부도사의 목을 베고 거사를 일으켰다.
관군을 패퇴시키고 이괄이 의기양양하게 한양에 입성하여 흥안군을 왕으로 세웠다.
다음날 장만과 정충신이 대군을 이끌고 인왕산 길마재에 올라가 진을 치고
도성을 내려다보며 이괄의 반란군을 단번에 쳐부술 계획이었다.
한편 이괄은 아침밥을 먹기 전에 관군을 격퇴시킨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산 위로 공격을 하였다.
관군과 반란군이 결전을 벌인다는 소문이 퍼지자 한양의 남녀노소들은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성 위로 산꼭대기마다 모여 밀고 밀리는 혼잡을 이루었다.
흥안군이 왕이 되던 정원군이 왕이 되던 우리는 관여할 바가 아니다.
난 놈이 있나 모두 선조의 후궁 소생인데 해볼 만한 일이라고 야유와 무관심 속에
싸움은 시작되었다.
밀리고 밀리는 싸움 속에서 이괄의 군대에서 한 장수가 관군의 화살에 맞아 쓰러지자
이것을 본 남이흥이 재빨리 이괄이 화살에 맞았다고 소리치자
이괄의 군대는 후퇴하기 시작했다.
아침밥을 먹기 전에 관군을 섬멸하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이괄은 도망치고 말았다.
쫓기던 이괄은 그날 밤 수구문을 탈출하여 삼전도를 거쳐 광주 목사를 죽이고
다시 경안역을 지나 이천에 이르렀다.
다음 날 자기의 부하인 기익헌이 피살되니 이괄의 삼일천하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