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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릉

뛰노라면 2010. 7. 28. 16:32
  • 4대 세종(世宗)
  • 능호 : 영릉
  • 위치 :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3-1
  • 지정번호 : 사적 제195호
  • 조성시기 : 1469년(예종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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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 어진

     

  • 능의구성
  • 영릉은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의 합장릉이다. 조선왕릉 중 최초로 한 봉우리에 다른 방을 갖춘 합장릉이며, 무덤배치는 국조오례의에 따라 만든 것으로 조선 전기 왕릉 배치의 기본이 되었다.

    1469년(예종1) 여주로 천장하면서 세조의 유명(遺命)에 따라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하였으며, 봉분 안에는 석실이 아니라 회격(灰隔:관을 구덩이 속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짐)하고, 혼유석 2좌를 마련하여 합장릉임을 표시하였다. 또한 기존의 왕릉에는 난간석에 십이지신상을 조각하여 방위를 표시하였는데, 영릉은 이를 간소화하여 십이지를 문자로 표현하였다.

    입지는 풍수사상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산의 중허리에 봉분을 조영하였으며, 좌우측에는 청룡, 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 능의역사
  •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에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에 이곳 여주로 옮겨 왔다.

    여주로 천장하면서 원래의 영릉 터에 있었던 상석, 망주석, 장명등, 문석인, 무석인, 석수, 신도비 등은 그 자리에 묻혔다.

     

    조선시대 문화의 황금기를 이룩한 조선 4대 임금 세종과 비 소헌왕후 능이다. 조선최초의 합장릉으로 동쪽 방은 왕후의 능으로 삼고, 서쪽 방은 왕이 살아 있을 때 미리 마련한 능으로 1450년에 왕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영릉 지구에는 조선 17대 임금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도 함께 자리 잡고 있다.

     

    4대 세종(世宗) 영릉 유적

     

    4대 세종(世宗) 영릉 유적 큰이미지

     

     

     

     

     

     

     

     

     

     

     

     

     

     

     

     

    새 글자를 탄생시킨 발상의 전환을...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

    1446년(세종 28) 9월,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글자인 한글이 반포되었다. 세종대왕이 일반 백성들이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새로운 글자를 창제하여 반포한 것이다. 이는 정치적, 학문적으로 매우 파격적인 발상이자 사건이었다.

     

    한글의 과학성

    한글은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에 창제를 완성하여 3년 동안 다듬고 이를 실제로 써 보아 그 부족함이 없음을 확인한 연후 반포되었다. 초성(初聲) 17자는 사람의 발음기관의 모양을 본떠서 기본 글자를 만들고 이에 획을 더하여 나머지 글자를 만들었으며, 중성(中聲) 11자는 천, 지, 인(天, 地, 人)의 모양을 본떠서 기본 글자를 만들고 나머지 글자는 이를 바탕으로 하여 음양의 대립으로 배합하여 만들었다. 이는 음운의 자질이 반영된 문자 체계로 보기 드문 독창성을 띠고 있다.

     

    『훈민정음』의 구성

    한글을 반포하면서 함께 간행한 새 글자에 대한 해설서 『훈민정음』은 ‘예의(例義)’와 ‘해례(解例)’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대들이 운서(韻書)를 아느냐? 4성(四聲)과 7음(七音)을 알며 자모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누가 바로잡는단 말이냐?”

    라고 하면서 대단한 학문적 자부심을 내비치고 있다.

     

    한글의 보급

    한글은 점차 백성들 사이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삼강행실도』, 『소학』등의 교화서는 한글로 번역되어 백성들에게 보급되었으며 선조 임금 대에는 한글로 쓴 교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이는 백성들 사이에 한글이 상당히 보급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사대부 계층에서도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이가 늘어났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한글 사용을 확대하는 데에는 여성들의 역할도 매우 컸다. 현재까지 전해오는 간찰 중에는 여성이 한글로 쓴 것들이 많으며, 여성을 독자로 하는 책들 또한 주로 한글로 간행되었다. 17, 18세기에는 한글 소설이 등장하기 시작하여 한글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글이 불러온 인쇄술의 발달

    한글은 인쇄술의 혁신마저 가져왔다. 세종대왕은 새로 만든 글자를 보급하기 위하여 학자와 기술자들로 하여금 활자를 주조하고 서적을 출판하게 하였다. 훈민정음의 반포 이후에 한글활자를 사용하여 인쇄한 것이 『석보상절』이다. 그 이후 한글 활자를 이용한 다양한 서적들이 간행되며 인쇄술의 발달을 가져오게 되었다.

     

     

    겨울에 세종대왕릉 풍경은...

     

     

     

     

     

     

     

     

     

     

     

     

     

     

     

     

     

     

     

     

     

    (우편번호 469-810)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영릉로 243.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여주행 버스(40분 간격)탑승, 여주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터미널 앞에서 이천방향 좌석버스111번 탐승 후 공군 부대앞 하차 걸어서 20분정도 거리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