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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찰(韓國寺刹) 편액(扁額) 사진모음

뛰노라면 2010. 7. 7. 11:53

한국사찰(韓國寺刹) 편액(扁額) 사진모음

 

-편액(扁額)-
서울 성곽의 남문인 숭례문에는 崇禮門이라는 글씨가 액자에 들어 세로로 걸려있다. 사찰의 각 전각에는

大雄殿, 極樂殿 등의 액자가 엮시 굵은 글씨로 쓰여 걸려있다. 이렇게 전각이나 문 위에 걸린 액자를

편액(扁額)이라고 하며, 흔히 현판(懸板)이라고 부른다. 대개의 경우 편액은 가로로 걸리며, 숭례문의

경우와 같이 세로로 걸리는 수도 있다.

 

편액은 널빤지나 종이 또는 비단 등에 글씨를쓰거나 그림을 그려 문 위에 건다. 편액에 쓰이는 글자는

대부분 한자로 쓰여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 여러 가지 글씨체가 다양하다. 또 요즈음은 한글로

된 편액을 걸기도 한다.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전각이나 건물에 걸린 편액의 글씨는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매우 많다.

 

이는 당시의 명필에게 글을 부탁하여 귀중하게 얻어 서각을 하거나 액자화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주요 사찰의 전각이나 누. 정 등에 걸린 편액 가운데는 주련과 함께 서예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들이 되는 것이 많다. 또 이들 편액은 사찰의 사적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경우도 많다.

 

 

의창군 이광(義昌君 李珖 1589~1645)은 조선 14대 임금인 선조의 여덟번째 서자로 호를 기천(杞泉)이라

했으며 시호는 경헌(敬憲)이다. 구례 화엄사 <대웅전.편액에는 “숭정구년 세사병자중추 의창군 광서
(崇禎九年 歲舍丙資仲秋 義昌君 珖書)라는 관지가 있어 의창군이 1636년에 쓴 글씨임을 알 수 있다.

 

 

의창군은 글씨에 능해 당대의 명필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 중에서도 부친인 선조가 즐겨 썼다고 하는 석봉 한호

(石峯韓濩)체의 글씨를 잘 썼으며, 특히 해서 대자(大字)에 뛰어 났다고 한다,그가 쓴 사찰 편액으로는 구례

화엄사<대웅전><지리산 화엄사> 전주 송광사<대웅전> 편액등이 전하며, 이 외에도 전에 결렸던 수덕사

<대웅전>편액이 그의 글씨였다.

 

 

그는 판서를 지낸 허성(許筬)의 딸과 혼인했는데 1618년(광해군 10년) 처족 허균(許筠)이모반죄로 주살되자

그에 연루돼 훈작을 삭탈 당하고 유배되는 비운을 겪었다,그러나 그는 1623년 인조반정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인조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전주 송광사 <대웅전>편액은 좁은 변죽에 세로 열개의 쪽판을 이어 붙이고 액판에도 문양을 넣어 장식한

보기드문 형식을 취했다. 액판 좌측에는 의창군 광서(義昌君 珖書)라는 붉은색과 흰색의 관지가 있다.
편액의 글씨는 결구가 건경(健勁)하고 운필이 청수(淸秀)한 해서로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글씨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 양명학자로서, 본관은 전주.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수북(壽北)이다. 
해서 초서 전서 예서에 두루 뛰어났고 그림에도 뛰어나 산수 인물 초충(草蟲)을 잘 그렸고 소박한 문인 취향의

화풍을 이루었다.

 

 

‘계곡을 베개 삼은 누각’ 이라는 이름의 침계루(枕溪樓). 큰 붓에 먹을 듬뿍 찍어 세상의 온갖 티끌 쓸어버리듯

한숨에 휘둘렀다. 침(枕)자를 쓰고 호방한 기운을 이어 계(溪)자를 쓴다. 삼수변의 점 하나 먼저 찍고 붓을 살짝

들어 다음 점으로 연결하면서 큰 파도가 몰아치듯 단숨에 계자를 써 내려가고는 숨을 멈추는 듯 마는 듯 마지막

점을 가다가 중간을 약간 휘어서 앉혔다.

 

마지막 루(樓)자 에서는 그야말로 면면부절(綿綿不絶) 휘휘 내둘러 획과 획 사이의 공간을 혹은 좁게 혹은 넓게

교묘하게 어울려 가면서 마음따라 움직이는 붓 놀림이 방일하고 호쾌하다. 특히 계집녀(女)의 마지막 획을 휘둘러

왼편 변의 나무목(木)까지 휘감아 끝 맺음을 한 것은 가히 놀랍다. 세상의 일상적 개념을 단칼에 잘라버리는 듯

파격적이며 호방한 기운이 하늘까지 닿을 듯한 대범 독특한 결구이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 하나도 어색하지

않는 장법에 놀라울 뿐이다. 

 

 

 

본관: 남평(南平). 자: 용삼(容三), 호: 해강(海岡), 萬二千峰主人, 白雲居士. 8세 때부터 외삼촌인

서화가 이희수(李喜秀)에게 글씨를 배웠고, 18세 때 청나라에 가서 8년간 書畵를 공부하고 돌아왔다.

 

 

 

경남 밀양 태생이다. 속명은 김용국(金鏞國), 법명은 정석(靜錫), 경봉(鏡峰)은 법호며, 원광(圓光)은 시호다.
스님은 한시와 필묵에도 뛰어나 많은 선화를 남겼으며, 특히 18세부터 85세까지 67년간 쓴 일지는 한국불교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지내며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바다를 제패함으로써

전란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명장이며, 모함과 박해의 온갖 역경 속에서 일관된 그의 우국지성과

고결염직한 인격은 온 겨레가 추앙하는 의범(儀範)이 되어 우리 민족의 사표(師表)가 되고 있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성당 선생은 구한말에서 일제시대를 산 분으로  본관은 경주. 자는 공숙(公叔). 호 성당(惺堂)이다.

어려서 안진경(顔眞卿)의 서체를 배우다가 황정견(黃庭堅)의 행서(行書)를 배웠으며, 예서(隸書)에도 능하였다.

서화협회 회장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하고, 서법 연구기관인 상서회(尙書會)를 설치하여 후진 지도에

힘썼으며, 일제시대에 검사(檢事)를 거쳐 중추원(中樞院) 촉탁을 지냈다.

 

 

 

석촌 윤용구(石村, 石邨 尹用求·1853∼1937) 는 문신·서화가로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석촌은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난죽(蘭竹)과 구양순(歐陽詢) 풍의 해서, 수경(瘦勁:가늘면서 힘찬)한 행서,

그리고 금석문(金石文)을 즐겨 썼다. 금석문으로 과천의 <문간공한장석신도비 文簡公韓章錫神道碑>와 광주

(廣州)의 <선성군무생이공신도비 宣城君茂生李公神道碑〉가 있으며, 전라남도 선암사 입구의 강선루(降仙樓)

현판 등을 남겼다.

 

 

 

조선의 23대 임금인 순조(純祖, 1790~1834)의 어필이다. 해서(楷書)체로 붓글씨에 힘이 느껴진다. 원래 선암사

원통전에 모셔졌던 글씨로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의 세 개의 편액이 같이 걸려져 있었으나 지금은 법당 안

정면에 대복전만이 걸려있고 인(人)․천(天)의 편액은 선암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순조의 어필이 선암사에 걸려있는 이유는 정조가 후사가 없자 전국의 이름난 기도처에서 정성을 다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자 \1788년 아교궁관(校宮官)을 선암사에 보내어 세자탄생의 기도를 당시의 고승 눌암스님과

해붕스님께 분부하게 되었고 이에 눌암스님은 원통전에서 해붕스님은 대각암에서 각각 100일 기도를 하여 세자인

순조가 탄생하였다 한다.

 

이에 정조가 1796년에 금병풍·은향로·쌍용문가사·대복전편액 등을 하사하고 다시 순조가 즉위한 1801년에 순조의

친필인 인, 천 두 글자를 하사하여 대복전의 글과 함께 걸게 했다고 한다. 여기서 ‘인천대복전’의 의미는 이곳

원통전이 6도의 세계 중 상위 세계인 하늘과 인간 세상에 큰 복짓는 밭으로서 누구나 스스로 짓는 복만큼 스스로

거둔다는 뜻이다. 

 

 

 

눌암(訥庵)   [조선후기] :눌암(訥庵)   활동년대 : 조선후기 
1조선 후기의 스님. 이름은 전(全)식활. 순천 율촌면 삼산리 사람이다. 1768년(영조 44) 17세에 순천 선암사에

출가했다. 묘향산 범왕봉에 있으면서 평안감사 윤사국(尹師國)의 귀의를 받았다. 1796년(정조 20) 국일도대선사

대각등계홍제존자라는 호를 받았다. 1797년 선암사(仙巖寺) 칠전에서 수행하는 선객들을 위해 열 두 가지의

절목(節目)을 작성하였다. 1830년(순조 30) 나이 79세, 법랍 62년으로 입적하셨다. 

 

 

 

담양 출신으로 약관의 나이에 입문, 송곡 안규동 선생을 사사하고, 원교 이광사와 추사 김정희 등 한국서예의

전통을 계승한 서예가로 잘 알려져 있다. 독창적 서체인 鶴亭體를 이뤄내는 등 한국 서단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지켜오고 있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 동아미술제 심사위원, 국제서법예술연합 한국본부

부이사장 등을 지냈다.  

 

 

 

창암은 순조 30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가세가 기우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글씨에만 몰두하여 평생을 곤궁하게 지낸 선비였다. 그는 어렸을 때 당대의 명필 圓嶠 李匡師의

글씨를 배웠으며 병중에도 하루에 천 자씩 썼다고 하는 이야기와 벼루를 세개 맞창내었고 천 자루의 붓을

몽그라뜨렸다는 일화(磨穿十硯 禿盡千毫)를 볼 때 그가 글씨에 매진하였던 정열은 상상을 초월하였던 것이다.


창암은 특히 행서와 초서를 잘 썼다고 전하는데 그리하여 거침없는 '창암체(流水體)'를 이루었다. 그것은 글씨이면서

그림이고 동시에 붓으로 추는 춤(筆舞)이었다고 한다. 뱀 같은 미물도 놀랄 지경의 神筆이라고 한다. 그래서 立春榜에

'李三晩'이라고 써서 문지방 아래 거꾸로 붙였다고도 한다. 그러면 뱀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정읍의 說話가 되었는데 뱀에 대한 이야기와 약방의 物目記로 인해 중국에 까지 알려진 이야기와

부채장수가 잠든 사이 부채에 몇자 적었더니 이삼만 글씨라 하여 모두 팔린 이야기와 양반집 墓碑文의 墨痕이

지워지지 않던 이야기 등 많기도 한데 그만큼 그의 글씨는 유명하였던 것이다.


지금도 전주를 중심으로 호남에서는 이삼만 글씨의 애호가들이 많고 또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는 學童들에게

體本으로 글씨를 써서 나누어 주었을 뿐아니라 원하는 知人들마다 선선히 글씨를 써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코 돈을 받고 써주진 않았다고 한다.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1873∼1943)는 전라남도 화순 출신으로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활동했던 서화가이다.

그는 일찍이 송사호(宋沙湖)에게 글씨를 배웠고, 글씨는 물론 사군자에도 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는

후에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術展覽會)에 입선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