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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뛰노라면 2010. 7. 8. 12:15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1)
  

 

조선일보는 대한민국 건국(建國) 60주년을 맞아

그 60년 역사 속의 영광과 고난의 역정(歷程)을 되새기려는 뜻으로에서

60가지의 대표적 사건들의 사진을 가려, 2008년 6월 13일부터

특별기획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의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1948년 대한민국이 태어난 이후 지나온 60년은 숱한 도전과 풍파에도 불구하고

헌법의 토대 위에서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성취한 자랑스러운 역사였습니다.

    유익한 기사이기에 사진과 내용 일부를 인용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사 원문은 각 항목 끝에 [원문보기]로 연결하였습니다.

 

[1] 정부수립 선포식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정부수립 선포식(사진 위)과

이를 보도한 16일자 조선일보 지면. / 조선일보 DB

   

 '세 돌 맞은 8·15 해방기념일. …지리한 장마도 개어 맑은 하늘빛이 더욱 맑아 보이는 첫 새벽부터 가가호호에는 국기를 게양하고 깨끗이 청소한 시가에는 중앙청 광장을 중심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1948년 8월 16일자 조선일보는 그 전날인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식의 광경을 그렇게 전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은 정부 수립을 세계 만방에 선포했다. 오전 11시 중앙청 광장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행사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은 "민권과 개인 자유를 보호하며 국제 통상과 공업 발전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이해 12월 유엔은 '대한민국은 선거 감시가 가능했던 지역에서의 합법 정부'라고 승인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13/2008061300035.html

 

  [2] 농지 개혁

 ▲ 농지개혁법을 재정하던 1949년 무렵 의 농촌 모습. / 조선일보 DB

 

1940년대 말 '새 나라'는 당장 무엇부터 해야 했을까. 국민의 70% 이상이 농민이고 농민의 대다수가 소작농이거나 자작 겸 소작농인 현실에서, 신생 대한민국 정부는 농토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농지(農地) 개혁부터 실현해야 했다. 그러나 불과 몇 달 뒤에 6·25전쟁이 일어났고 북한은 점령지에서 새로운 토지개혁과 선동 공세를 벌였지만, 이미 자신의 농지를 갖게 된 많은 농민은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14/2008061400011.html 

   

 [3] 제헌 국회

국민이 뽑은 209명, 그들이 뽑은 이승만 대통령

▲ 1948년 5월 31일 열린 제헌국회 개회식에서 이승만 의원이 의사진행을 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민주정체(民主政體)에는 민중이 주권자이므로 주권자가 잠자고 있으면 나라는 다시 위태한 자리에 빠질 것이니, 지금부터 시민 된 남녀는 다 각각 제 직분과 제 권리를 충분히 이행하며 사용해서 부지런히 분투 노력함으로 국권을 공고케 하며 인권을 보호하여 만인공영(萬人共榮)을 도(圖)할지니…." 1948년 5월 31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인 제헌국회(制憲國會) 개회식에서 의장으로 선출된 이승만(李承晩)은 감격에 찬 목소리로 식사(式辭)를 낭독했다.

제헌국회는 7월 17일 제헌헌법을 공포했고, 20일 국회 내의 간접선거를 통해 180표를 얻은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임정의 핵심 인물이었던 이시영(李始榮)과 이범석(李範奭)이 각각 부통령과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광복 이후 이승만과 정치적 노선을 함께 했던 한국민주당은 내각 구성 단계에서 갈라짐으로써 여야 정당정치의 개막을 알렸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16/2008061600092.html

     

 [4] 헌법 제정 공포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 선포

   1948년 7월 17일 이승만 제헌국회의장이 헌법에 서명하고 있다.

  

1948년 6월 1일 국회에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만들어지고, 42세의 유진오(兪鎭午) 등을 전문위원으로 위촉해 헌법을 기초하게 했다.
7월 12일 만장일치로 가결된 헌법은 마침내 7월 17일 공포됐다. 헌법은 대한민국이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공화국'임을 분명히 했고, 모든 국민에게 평등권·자유권·재산권·교육권이 있음을 밝혔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17/2008061700077.html

 

 [5] 국군 창건

600명 '국방경비대'로 시작한 국군

▲ 1946년 1월 창설, 국군의 모체가 된 남조선 국방경비대의 행진 모습. / 조선일보 DB

 

1946년 1월 14일부터 국방경비대원 모집을 시작하여, 다음 날인 15일 불과 600명으로 이뤄진 국방경비대 1개 대대가 태릉에서 설립됐다. 미 군정청이 치안을 목적으로 창설한 이 조직이야말로 오늘날 국군의 모체(母體)였다.

6월 15일에는 조선해안경비대가 발족했다. 정부수립 직후인 1948년 9월 1일 조선경비대(옛 국방경비대)와 해안경비대는 국군으로 개편됐고, 9월 5일 각각 육군과 해군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건군(建軍)이 이뤄진 것이다.

1949년 10월 1일에는 육군 산하였던 항공부대가 공군으로 독립했다.
이범석(국방장관), 김홍일(육군참모학교장), 최용덕·김신(공군참모총장), 김국주(1군 부사령관) 등 광복군 출신 인사들이 국군 내에 존재했다는 사실 역시 기억될 필요가 있다. 초대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손원일도 독립운동가 출신이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17/2008061701952.html 

 

 [6] 반민특위

친일 단죄!… 반민특위, 682명 조사

 

▲ 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된 피의자들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49년 1월 8일 해외로 도피하려던 화신백화점 소유주 박흥식이 백화점 현관에서 체포됐다. 그를 시작으로 관동군 촉탁 출신 이종형, 중추원 참의를 지낸 최린, 경찰 노덕술, 지식인 최남선·이광수 등이 속속 검거됐다. 그들의 혐의는 '일제하의 친일(親日)행위'였다. 반민특위(反民特委) 즉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다. 

반민특위는 조사 대상 682명 중 221명을 기소했고 12명이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유예 등으로 모두 풀려났다. 그러나 반민특위의 조사 대상이 됐던 명단 자체가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19/2008061900061.html

 

 [7] 6.25 전쟁

신생 대한민국 기반 무너뜨린 '대참화'

 

 ▲ 전쟁의 폐허 위에 주저앉은 어머니는 오열하고 있고, 아들은 그런 엄마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6·25 당시 미국의 종군 사진가였던 조지스 디미트리 보리아가 촬영한 것이다. / 미국 맥아더기념관 제공

  

출범한 지 채 2년도 지나지 않은 신생 대한민국과 그 국민들에게 너무도 가혹한 참화(慘禍)가 닥쳐왔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 동안 계속된 6·25전쟁은, 빈약한 사회경제적 기반마저 송두리째 무너뜨린 대재앙이었다. 한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남한에서만 85만명에 이르는 군인과 민간인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8만명 이상의 남한 주민들이 북으로 납치됐다. 근대국가 체제가 형성된 이래 지난 500년 동안 일어났던 모든 전쟁 중에서 인명 피해 규모가 7번째에 해당하는 전쟁이었다는 통계도 있다.  
전쟁은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와 적대의식을 낳았지만, 한국인의 지연(地緣)을 해체하고 전통적인 신분의식에서 벗어나는 계기도 됐다. 미국과 동맹국이 됨으로써 자유시장 경제체제인 '해양 문명권'에 편입되는 대전환도 이뤄졌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0/2008062000105.html

 

[8] '평화선' 선포

'독도는 우리땅' 주권선언, 일(日) 도발로 영토분쟁 시작

 

▲ 독도에 ‘한국령’ 표지를 새긴 직후인 1954년 8월 28일 독도의용수비 대의 모습. / 조선일보 DB
 

전쟁 중이던 1952년 1월 18일 선포한 '대한민국 인접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은, 일본에 대한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영토수호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약 97㎞)에 이르는 해역에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긋고 그곳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여기서 평화선이 독도(獨島)를 확실한 대한민국의 영토 안에 포함했다는 점이 주목돼야 한다. 일본 정부는 평화선 선포 열흘 뒤 '일본 도서인 다케시마(竹島·독도를 일본에서 부르는 말)에 대해 한국이 영토권을 상정했다'고 항의하는 외교 문서를 보냈다. 그것은 지금까지 끈질기게 이어지는 양국 간 독도 분쟁의 시작이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1/2008062100023.html

   

[9] 반공포로 석방과 휴전

당사국 빠진 정전(停戰)협정

   

▲ 1953년 6월 25일 부산 미국대사관 앞에 모인 여학생들이 ‘휴전 회담 결사 반대’

‘통일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53년 6월 18일 새벽,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명령에 의한 전격적인 반공포로 석방은 전 세계를 경악시켰다. 북한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던 '반공포로' 3만5,000여 명 가운데 2만7,000여 명이 자유를 되찾았다. 그것은 '이승만은 단독으로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었다.

   

1953년, 세계 정세는 바뀌고 있었다. 1월에는 6·25전쟁의 조기 종결을 공약으로 내건 아이젠하워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고, 3월 스탈린이 사망하자 소련 정부는 전쟁을 끝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오랫동안 휴회에 들어갔던 정전(停戰) 회담이 재개됐으나 이 대통령은 4월 9일 '휴전반대 단독북진' 성명을 발표했다.  '전쟁의 당사자인 한국의 뜻이 무시되고 있다'고 생각한 많은 국민은 대규모 휴전 반대 시위에 나섰다.

    

이 대통령의 휴전 반대는 미국이 한반도 문제에서 발을 빼지 못하게 하려는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었고, 반공포로 석방 역시 미국에 대한 압박의 하나였다. '이승만을 달래기 위해서는 전후(戰後) 군사·경제적 지원을 약속해야 한다'고 판단한 미국은 한국의 요구에 따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대표 사이에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이날 밤 10시를 기해 155마일 전선에서 마침내 총성이 멎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3/2008062300001.html

 

[10] 사사오입 개헌과 제3대 大選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별수 없다" 

 

  ▲ 1956년 제3대 대선에서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구호를 들고 나선 민주당의 유세 차량.

 

1954년 9월 집권 자유당이 발의한 개헌안에는 '초대 대통령에 대한 중임(重任) 제한을 철폐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종신 집권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었던 것이다. 11월 27일 국회에서의 개헌안 표결결과 가(可) 135표가 나왔다.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인 136표에서 1표가 부족해 부결이 선포됐지만, 이틀 뒤 최순주(崔淳周) 부의장은 "203명의 3분의 2는 사사오입(四捨五入·반올림)에 의해 135명이므로 가결됐다"고 말했다. 헌정사에 오점을 남긴 이 개헌에 반대한 의원들은 호헌동지회를 결성, 1955년 제1야당인 민주당으로 발전시켰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는 사상 두 번째, 휴전 이후 첫 직접선거였다. 민주당의 신익희(申翼熙) 후보는 지금까지도 반정부 시위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구호를 처음으로 내걸고 이승만에 도전했다. 그것은 "못살겠다 갈아보자"였다. 여당인 자유당은 "갈아봤자 별수 없다"로 맞섰지만 독재에 지친 국민들은 5월 3일 신익희의 한강 백사장 연설에 30 만명이 운집할 정도로 호응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5일, 신익희는 유세를 위해 호남으로 가던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急逝)했다. 5월 15일의 투표에서 국민들이 이미 세상을 떠난 신익희에게 던진 표(무효표)는 서울에서만 이승만보다 8만표가 더 많았다. 81세의 이승만은 3대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민주당의 장면(張勉)이 자유당의 이기붕(李起鵬)을 꺾고 부통령이 돼 '여야 동거'의 구도를 이뤘다.

원문보기 :   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4/2008062401085.html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2)
  

 

[11] 우리말 큰사전 완간
문화 광복… 되살아난 우리말

▲1957년 10월 9일 우리말 큰사전 6권 완간당시 한글학회 관계자들의 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이강로, 권승욱, 정인서, 정인승(편찬 주간), 류제한, 한종 수씨. / 한글학회 제공 
     

 "원고가 다 어디로 갔단 말이오?"
1945년 8월 광복과 함께 감옥에서 풀려난 조선어학회 회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1942년 일어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회원 33명이 일제에 붙들려 가 혹독한 고초를 당했다. 당시 편찬 중이던 사전의 원고를 압수 당한 뒤로 그 행방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모두 불탄 것은 아닐까. 눈앞이 캄캄했다.

  

'우리말 큰사전'이 처음 계획된 것은 일제의 강점 통치가 점차로 더 엄혹해지던 1929년이었다. 조선어사전 편찬회는 발족 취지문에서 "언어의 정리와 통일을 급속히 꾀해야 문화가 촉성하는 것이며, 그를 실현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의 편성"이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말과 글을 잃으면 민족도 멸망한다"고 가르친 국어학자 주시경의 제자였으며, 1933년에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 아래 사전 편찬은 중단됐고, 원고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1945년 9월, 서울역 운송부 창고에서 그 원고가 고스란히 발견되는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다. 일제가 재판의 증빙 자료로 법원에 이송하려던 것이 거기에 방치돼 있었던 것이다. 원고를 손에 든 회원들은 잃어버린 자식을 되찾은 듯 눈물을 쏟았다. 그들은 1947년 10월 사전의 첫 권을 간행하고 1949년 '한글학회'로 단체명을 바꿨다. 미국 록펠러재단으로부터 종이와 잉크를 지원 받아 남은 책을 발간하던 중 6·25가 터지자 발간 못한 원고를 땅속에 묻어 두었다.

  

1957년 10월 9일 한글날, 28년의 세월 동안 온갖 풍상을 겪었던 '우리말 큰사전'(을유문화사) 6권이 마침내 완간됐다. 16만 4,125개 어휘에 방언·고어·전문용어를 포함한 이 사전은 훈민정음 반포 511년 만에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한글 대사전이었다.

최현배 한글학회 이사장은 머리말에서 "민족 문화를 창조하는 이로운 연장이 되며, 창조된 문화재를 거두어 들여 앞으로 자꾸 충실해 가는 보배로운 곳집이 되길 바란다"고 썼다.

광복 12년 만에 진정한 '문화의 광복'이 이뤄졌던 것이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5/2008062500087.html
 

  [12] 진보당 사건
형장(刑場)의 조봉암 "마지막 술 한 잔을 달라"

  ▲ 1958년 10월 서울고등법원 재판정에서 열린 진보당사건 재판. 

  

조봉암(曺奉岩)은 1925년 조선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던 한국 공산주의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1946년, 노동계급의 독재와 자본계급의 전제를 모두 반대 하는 '중도통합노선'을 주장하고 공산당과 결별한 뒤 대한민국 건국에 참여했다.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역임하고 2,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신익희의 급서 때문이기도 했지만 3대 대선에서 216만여 표를 얻어 자유당을 위협했다. 그가 1956년 11월 창당한 진보당은 민주사회주의를 표방, 한국 혁신정당의 물꼬를 텄다.

  

1958년 조봉암은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그의 '평화통일론'이 북한 노선과 같으며, 북한과 접선해 자금을 전달받았다는 것이었다. 1심에서 주요 혐의가 인정되지 않아 징역 5년이 선고됐지만, 3개월 뒤 2심에서는 갑자기 모든 혐의가 인정돼 1959년 2월 2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됐다. 사형 집행에는 미국도 반대했으나 재심이 기각된 바로 다음 날인 7월 31일 사형은 서둘러 집행됐다.

이른 바 '진보당 사건'의 본질이 간첩 혐의가 아니라 최고 권력자가 정적(政敵)을 제거하려는 의도에 있었음은 민초들의 눈에도 뚜렷했다.
사형 직전 그가 남긴 말은 "내 죄는 정치활동밖에는 없는데…. 마지막 술 한 잔을 달라" 였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6/2008062600026.html

    

  [13] 4.19
대의 민주주의 내 딛은 '혁명'

▲ 4.19혁명 당시 광화문 시내에서 트럭에 올라타 시위하는 학생과 시민들.

 

1960년 2월, 사람들은 비정한 기시감(旣視感)에 몸을 떨었다. 꼭 4년 전 신익희처럼, 4대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 조병옥도 선거 직전 별세했던 것이다. 85세 이승만의 4선은 확정적이었다. 노골적으로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던 집권 자유당은 이번에는 2인자인 이기붕을 꼭 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해 조직적인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전국이 규탄 시위로 들끓었고, 마산에선 눈에 최루탄이 박힌 고등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됐다.

  

4월 18일. 3,000명의 고려대 학생들이 '민주 역적을 몰아내자'며 서울 시내로 행진, 국회에서 연좌 농성에 들어갔다. 이들은 돌아오던 중 종로 4가에서 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피를 흘렸다. 그 충격은 예상을 뛰어넘었다. 19일. 10만명의 서울시내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이 해일(海溢)처럼 거리로 뛰쳐나왔다. 경찰의 총격으로 180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전선(戰線)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국론은 나뉘지 않았고, 사안은 분산되지 않았으며, 막연한 공포감이 대중을 사로잡는 일도 없었다. 그것은 10년 넘게 이어진 장기집권과, 선거라는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 유린된 데서 나온 국민적 분노의 폭발이었다. 야당은 대중의 지지를 얻고 있었고, 결정적인 순간 시위에 가담한 대학교수들은 사회적 사표(師表)와도 같은 지위였다. 물론 반미(反美) 감정도 없었다. 이기붕의 집에서 성조기가 발견되자 군중은 취재 중이던 미국 기자에게 그걸 건네 줬다.

 

4월 26일, 대통령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며, 선거를 다시 하도록 하겠다"며 경무대를 떠났다. 차기 대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이기붕의 일가족은 자살했다. 12년간에 걸친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은 종식됐다. 이는 4월혁명, 4·19혁명, 4·19학생혁명, 또는 4·19민주혁명 등으로 불리다가 5·16 이후 의거(義擧)로 규정됐으나 김영삼 정부 들어서면서 혁명으로 환원됐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7/2008062700031.html

 

 [14] 제2공화국
너무 짧았던 '내각제 실험'

 

  ▲ 1960년 10월 1일 제2공화국 출범 경축식. 

왼편-윤보선 대통령 내외, 오른편-장면 국무총리 내외

   

윤보선(尹潽善)과 장면(張勉). 대한민국의 역대 집권자들 중에서도 이 두 사람의 얼굴은 좀처럼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제2공화국이 무척 새롭고도 이례적인 체제 위에서, 정치적으로 너무도 짧은 시간을 불꽃처럼 장식하고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미완의 실험'이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1960년 5월 29일 이승만은 하와이로 망명했고, 그와 함께 집권 자유당과 대통령중심제도 소멸했다. 대통령제에 대한 공포감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낳았으며, 이 개헌안은 6월 15일 국회에서 통과됐다. 7월 29일의 총선에서 민주당은 압승했고 양원제(兩院制)로 이뤄진 5대 국회가 성립했다. '국가원수'인 대통령에는 윤보선이 선출됐고, '실권자'인 총리에는 장면이 지명됐다.
8월 13일 출범한 제2공화국의 앞길에는 '민주화'와 '산업화'라는 대한민국의 양대 과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혼란은 끊이지 않았다. 윤보선의 구파(舊派)와 장면의 신파(新派)는 줄곧 대립했다. 젊은 정치인들 중 김영삼은 구파, 김대중은 신파였다. 구파는 11월에 기어이 신민당을 창당해 야당이 됐다. 4·19 이후 분출된 온갖 시위와 학생운동은 체제마저 위협했다. 초·중학생과 경찰까지도 시위를 벌일 정도였다. 학생운동은 과격해지고 사회운동은 이념적인 성향을 띠었으며, 급진적인 통일론이 대두했다.

  
장면 정권이 과연 그것을 수습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갖추고 있느냐는 문제 이전에, 그들에게 진정으로 부족했던 것은 '시간'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총리 장면은 떨어져 깨진 안경조차 수습하지 못한 채 수녀원으로 피신해야 했다. 9개월이라는 짧은 실험의 종막(終幕)이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8/2008062800062.html

  [15] 5.16
쿠데타, 개발과 독재 길 열다

 ▲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가운데)이 박종규 소령(왼쪽), 차지철 대위(오른 쪽)와 함께

서울시청 앞에 서 있다. 조선일보 사진부 정범태 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조선일보 DB

  

1961년 5월 16일 오전 서울시청 앞에서 처음으로 언론에 노출된 육군 소장 박정희(朴正熙)는 선글라스를 쓰고 뒷짐을 진 채 5·16의 상징처럼 돼 버린 유명한 사진을 남겼다. 사진을 촬영한 조선일보 기자 정범태는 "그는 차갑고 무뚝뚝했다. 저런 사람이니까 혁명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회고했다.

그날 새벽에 라디오 방송을 들은 국민들은 하룻밤 사이에 세상이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今朝) 미명(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 입법, 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이어 군사혁명위원회를 조직하였습니다." 그들은 이어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義)로 삼고, 모든 부패와 구악(舊惡)을 일소하며,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구악'이나 '기아선상' 같은 어휘들이 이 '혁명 공약'으로 인해 일상어가 됐다.

그것은 육군참모총장 장도영(張都暎)의 이름으로 된 공약이었으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이미 4·19 전부터 '거사'를 논의했으며 그날 새벽 군대를 움직여 서울에 무혈 진입했고, 전 육군 중령 김종필(金鍾泌)이 초안을 잡은 혁명 공약의 최종 교열을 본 사람은 모두 박정희였다. 그날 발행된 조선일보 석간, 이튿날 조간은 서슬 퍼런 검열의 상황에서도 이 사건을 '군부 쿠데타'로 규정했다. 헌법 절차에 의해 수립된 정부를 일부 군부 세력이 불법적으로 전복한 일은 분명한 쿠데타였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29/2008062901012.html

[16]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가난과의 전쟁... '한강의 기적' 막 오르다

▲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막 시작된 1962년 2월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모습.
1968년까지 석유화학 관련 공장 13개가 이곳에 들어섰다. / 조선일보 DB

  

"지금 성장률 7.1%라고 했습니까?"

1961년 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朴正熙)가 미국 때, 동행한 경제기획원 부원장 송정범(宋正範)이 경제개발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만난 미 국무부 해외개발처장 해밀턴은 "그렇게 높은 성장 목표는 선진국에서도 없는 일"이라며 혀를 찼다.

  

그때 대한민국은 세계 최빈국(最貧國) 중 하나였다. 1960년의 1인당 국민소득은 79달러였고, 무역적자는 GNP(국민총생산)의 16%인 3억 달러에 달했다. 국가적 가난의 원인이 사대주의와 게으름에 있었다고 생각했던 박정희는, 경제개발을 국가의 최우선 과제로 삼기로 결심했다. 쿠데타가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1961년 7월 22일에 경제기획원이 설립됐다. 경제발전의 방향과 개발 정책 수립은 물론 정부 예산 편성과 각 부처 통제라는 실로 막강한 권한이 이곳에 집중됐다.

  

1962년, 경제기획원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자립경제의 달성을 위한 기반 구축이 그 목표였다. 자금은 확보되지 않았고, 무리한 화폐개혁도 실패했다. 그런데 1963년부터 선진국에서 노동집약적 경공업이 사양화되면서 한국 공업제품의 수출이 크게 늘었고, 경제개발의 기본 전략은 수출주도형으로 완전히 바뀌었다. 자본도 자원도 없이 맨손뿐인 한국에는 오직 값싸고 질 좋은 노동력만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1966년까지 한국의 연평균 성장률은 7.8%였다. 이후 4차 5개년 계획 기간이던 1979년까지 한국은 '개발 연대(年代)'라 불린 수출주도 산업화 시대를 겪게 된다.
   
그러나 '군(軍)에 복귀하겠다'는 박정희의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1963년 8월 30일 "다시는 이 나라에 본인과 같은 불운한 군인이 없도록 하자"는 유명한 말을 남긴 채 군복을 벗고 전역했고, 10월 직선제인 제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힘겹게 당선됐던 것이다. 어쨌든 '민주주의적 절차'를 갖춘 제3공화국의 출범이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1/2008070100052.html

 

[17] 광부, 간호사 西獨으로 가다

獨 탄광서 울어버린 朴正熙 대통령

▲ 서독 요하네스 크랑켄하우스 병원에 취업한 한국 간호사들.
이들은 친절하고 성실해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 조선일보 DB

  

1963년 12월 21일 서독 '루르' 지방의 '함보른'탄광에 파견될 광부 1진이 출국했다. 파견 광부 선발에는 2,800여 명의 지원자가 몰려 367명이 최종 합격했고, 신문마다 이들의 명단을 사법시험 합격자처럼 실었다. 대졸자가 20%나 돼 '신사 광부'라 불렸다. 지하 1,000m에서 30도의 지열이 뿜어져 나왔고 작업 도구는 50㎏이나 됐다. 3년 뒤 이들이 귀국했을 때 대부분 골절상을 겪은 다음이었다. 마지막 출국자까지 합치면 모두 8,300여 명의 한국 광부들이 서독에서 일했다.
당시 국민소득 87달러, 인구 2,400만 명에 실업자는 250만 명이 넘었으며, 종업원 200명 이상의 기업은 54개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광부 파독(派獨)은 실업 해소와 외화 획득을 위한 돌파구였다.

 

간호사의 서독 파견도 이 무렵 시작됐다. 1962년 20여 명의 간호학생들이 파견됐고, 1966년부터 1976년까지 1만300여 명의 간호사들이 서독으로 건너갔다. 1973년 서독 전체 병원에서 일하는 한국 간호사는 6,000명이 넘었다. 이들은 노인 환자들에 대한 극진한 간호와 민첩한 업무처리로 현지에서 찬사를 받았다.
 서독 요하네스 크랑켄하우스 병원에 취업한 한국 간호사들. 이들은 친절하고 성실해 현지에서 호평을 받았다. 조선일보 DB 1964년 12월 10일, 광부와 간호사 300여 명이 루르 지방의 함보른 탄광회사 강당으로 모여들었다.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찾았던 것이다.

  
당시 통역관이던 백영훈의 회고에 따르면, 광부 밴드가 애국가를 연주했는데 "대한사람 대한으로…" 부분에선 흐느낌 때문에 더 이상 노래가 들리지 않았다. 대통령은 연단에 올랐다. "조국의 명예를 걸고 열심히 일합시다. …비록 우리 생전에는 이룩하지 못하더라도 후손을 위해 남들과 같은 번영의 터전만이라도 닦아… 놓읍…." 연설은 중단됐다. 장내를 가득 메운 울음소리가 전이(轉移)돼 대통령마저 울어 버렸기 때문이다. 영부인과 수행원들도 모두 울었다. 광부와 간호사들의 송금액은 연간 5,000만 달러로 한때 GNP(국민총생산)의 2%에 달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1/2008070101704.html

    

  [18] 6.3사태와 한.일협정
'굴욕협상' 논란 속 빗장 연 韓.日

▲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 수상관저에서 열린 한일협정 조인식. / 조선일보 DB

 

1951년부터 1960년까지 한·일 양국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다섯 차례의 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했다. 경제개발계획의 자금이 절실히 필요했던 박정희(朴正熙) 정부는 대일 국교 정상화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1962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장 김종필(金鍾泌)과 일본 외상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사이에 대일 청구권 문제를 합의한 비밀각서 '김·오히라 메모'가 작성됐다.
 
하지만 1964년 초에 이 내용이 알려지면서 제3공화국은 커다란 위기 국면을 맞았다.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와 배상 대신 헐값차관으로 타결하려 한다는 여론이 일어났고, 야당과 학생들은 4·19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에 나섰다. 3월 24일 서울 시내 대학생 5,000명이 "굴욕 외교에 반대한다"며 거리로 나선 이후 두 달 넘게 시위가 이어졌다. 
  
6월 3일에는 1만여 명의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했다. 일부 불량배들도 끼어 든 군중은 파출소에 방화하고 군 트럭을 탈취했으며 청와대 외곽에선 경찰 저지선이 일부 뚫렸다. 그날 저녁 9:40 정부는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계엄령 기간 55일 동안 1,120명이 검거됐고, 서울대 시위주동자 김중태·현승일과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 이명박 등 348명이 구속됐다.
 
해를 넘긴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 수상관저에서 외무장관 이동원(李東元)과 일본 외상 시나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가 한일 기본조약에 서명, 14년간의 국교정상화 협상에 마침표를 찍었다.  8억 달러의 경제협력자금 대신 침략에 대한 사죄를 생략해 버린 이 조약은 지난 43년 동안 '굴욕 협상'이었던 것으로 인식돼 왔다.
  
그러나 2008년 5월 3만6,000여 쪽의 한·일 회담 문서 전부를 처음으로 분석한 국민대 일본학연구소(소장 이원덕)는 상당히 새로운 평가를 내놓았다. 한국 정부가 미국과 협력해 일본을 압박하는 전술을 썼고, 유능한 외교 관료들의 치밀한 사전 준비를 통해 청구권 액수를 높이는 등 비교적 성공을 거둔 협상이었다는 것이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2/2008070201777.html 

▲ 1964년 한일회담 반대시위(6.3 사태)와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를 기록한 영상물.

1997년 제작된 '아! 대한민국'의 일부분. / 유석재 기자

 

 [19] 월남 파병
피와 바꾼 달러, 가난 탈출의 종잣돈으로

▲ 청룡부대 환송식. / 1966년 10월 3일.

▲ 1967년 월남(베트남)의 늪지대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있는 맹호부대 장병들. / 조선일보 DB

    

1964년 봄, 주미대사 김정렬은 워싱턴에 온 주독대사 최덕신을 통해 대통령 박정희가 내린 특명을 전달받았다. "미국 정부 요인들에게 월남(越南·베트남) 방어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한국군을 파견하겠다고 제안하시오!"

  

그것은 대단히 위험한 선택이었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정부가 정치적 위기에 몰려 있던 바로 그 시점에, 박정희는 미국조차 탐탁잖은 반응을 보이고 있던 월남 파병을 강행하려 했던 것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였다. 월남이 공산화된다면 동남아와 한국의 안보도 위협받을 것이 분명하고, 또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내 월남에 투입하려는 구상을 사전에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월남 파병은 이렇듯 미국이 아닌 한국 정부의 전략적인 주도로 시작됐다.

  

1964년 9월에 이동병원 부대 등 140명이 처음으로 월남에 갔고, 1965년 2월 2,000명의 공병·수송부대가 파견됐다. 마침내 10월 12일, 해병 청룡부대와 육군 맹호부대로 이뤄진 전투부대 2만 명이 30만 인파의 환송을 받으며 본격적인 파월(派越)의 막을 올렸다.

1973년 3월 철수를 끝낼 때까지 모두 31만2,853명의 한국군이 파병됐다. 이들은 1만여 회의 대규모 작전과 55만여 회의 소규모 작전을 펼쳐 4만1,000여 명의 적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월남 파병은 대한민국에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 줬다. 필요한 물자와 용역을 국내에서 조달했기 때문에 월남으로의 수출이 급증했다. 군인·노동자가 받은 봉급과 현지 한국 기업의 사업수익까지 합하면 10억 달러 이상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이 돈은 2,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핵심 재원이 됐다.

당시에 '월남'이란 말은 시대를 대변하는 코드였다. 신중현이 작곡하고 김추자가 노래한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가 히트했고, 군가 '맹호는 간다'가 애창곡이 됐다. '월남치마'가 유행했다.

  

하지만 '번영의 터전'을 만들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피와 희생이 필요했다. 4,600여 명의 장병이 이역만리에서 전사했고, 1만 7,000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枯葉劑)는 아직도 수많은 참전 용사들에게 고통으로 남아 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4/2008070400033.html 

 

 [20] 김현옥 서울 개발
'39세 불도저 市長' 서울의 얼굴을 바꾸다

▲ 청계 고가도로가 건설되기 직전인 1967년 5월 청계천의 복개 공사 모습.

청계 고가도로는 김현옥 서울시장이 뚫은 수많은 도로들 중 하나였다. / 서울시 제공

  

1963년 서울시장이 된 윤치영은 "서울을 좋은 도시로 만들지 말아야 농촌 인구가 몰려오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1966년 모든 것은 달라졌다. 4월 4일 제14대 서울시장으로 39세의 김현옥(金玄玉)이 부임한 뒤, 이제 서울이라는 도시의 모습은 그 전과는 완전히 바뀌게 된다.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육사를 졸업한 김현옥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그는 '돌격'이라고 쓰인 헬멧을 쓰고 현장을 누볐다. 실로 엄청난 도로가 새로 뚫리거나 넓혀졌다. 불과 8~10m 폭이던 독립문~구파발, 왕십리~광나루, 청량리~망우리 등 외곽 간선도로의 너비가 35~40m가 됐고, 낡고 느린 전차 노선들은 완전히 뜯겨졌다.

  

사직터널과 삼청터널, 남산 1·2호 터널 등을 뚫고 마포대교를 기공했다. 서울역 고가도로와 북악 스카이웨이, 청계 고가도로를 건설했고 강변도로를 처음 만들었으며 144개의 보도육교를 가설했다. 도심 개발 사업도 본격화됐다.

  

세운상가·낙원상가와 수백 동의 시민 아파트가 건설됐고 여의도 개발계획이 세워졌다. 1969년 12월 준공된 제3한강교(지금의 한남대교)는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었다. 사창가의 상징과도 같던 '종삼(종로3가 유곽)'은 1968년 9월 일명 '나비작전'에 의해 완전히 사라졌는데, 한 아가씨가 이곳을 시찰하던 김현옥을 몰라보고 "아저씨, 놀다 가요"라며 소매를 붙잡은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한 해 개발 목표를 2년 전의 1,100%로 잡기도 했던 그의 '속도전'에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1966년 6월 12일자 조선일보의 대담에서 소설가 박경리는 김현옥에게 "많은 혼란이 뒤따른다고 시민의 불평도 많다"고 말했다. 결국 1970년 4월 8일 준공 4개월밖에 안 된 와우아파트가 붕괴돼 33명이 사망한 대형 참사가 일어났고, 김현옥은 그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김현옥의 서울 개발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서울뿐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를 바꾼 인물"이라는 찬사가 있는가 하면, "임면권자의 정치적 목적과 전시 효과를 위해 군대식으로 총력 개발을 했다"는 비판도 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5/2008070500020.html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3)
  

[21] 1.21 사태
北 특수부대 31명 서울 침투

▲ 1968년 1월 22일 국군에 생포된 무장 간첩 김신조.
그는 훗날 전향한 뒤 대한민국에 정착, 목회자의 길을 걸었다. / 조선일보 DB

     

"박정희의 모가지를 따러 왔다."(김신조)
"고약한 놈들, 결국 여기까지 쳐들어왔구먼."(박정희)

1967년 5월 제6대 대선에서 116만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심각한 안보 위기에 직면했다. 그해 북한 김일성(金日成)은 통일 전략을 무력적화 노선으로 바꾸고 대남 무장 공세를 강화했다. 7월에는 중앙정보부의 무리한 수사와 가혹행위로 물의를 빚은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이 일어났다.

 

1968년 1월 21일 밤 10시, 군복을 입고 무장한 31명의 괴한들이 자하문 고개를 넘었다. 이들의 정체는 북한 124군 소속 특수부대원들이었으며, 나흘 전 휴전선을 넘어 시속 10km로 산속을 주파해 그곳에 닿았던 것이다. 목표는 청와대 습격과 박정희 살해였다. 이제 모퉁이 하나만 돌면 청와대였다.

 

그때 종로경찰서장 최규식(崔圭植)이 탄 지프가 아래쪽에서 올라왔다. "소속을 밝히시오! 외투 안에는 뭐가 들었소?" 최 서장이 권총을 뽑아 들고 저지할 때 시내버스 두 대가 올라와 멈춰 섰다. 지원 병력으로 오판한 간첩들은 최 서장의 가슴에 총을 쏜 뒤 버스에 수류탄을 던지고 흩어져 달아났다. 다음날 새벽 인왕산 기슭에서 인민군 소위 김신조(金新朝)가 생포됐고, 나머지 간첩 30명 중 27명이 교전 도중 사살됐으며 1명은 나중에 시체로 발견됐다. 

   
김신조가 잡힌 바로 다음날, 동해에서 활동 중이던 미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Pueblo) 호가 북한에 납치됐다. 한반도는 한때 전면전의 위기로 치달았다. 그해 11월에는 울진·삼척에 120명의 북한 무장 게릴라가 침투했다. 1968년 한 해 동안 남북한 사이에 356건의 무력 충돌이 일어나 518명이 전사했다.

 

1·21 사태의 여파는 컸다. 정부는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을 창설했으며, '서울 요새화 계획'에 의해 비상시에 서울 시민 30만~4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가 1970년까지 건설됐다(남산 1·2호 터널). 수많은 국민들에게 이 사건은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남게 됐다. 그것은 북괴군이 언제라도 우리의 일상 생활 속으로 침투할 수 있다는 공포였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6/2008070600935.html 

 

[22] 전자산업의 태동 
전자 입국(立國)… 막차 맨 끝 칸에 올라타다 

▲ 제4공화국 시절 컬러TV를 제조하고 있는 한 전자회사의 모습.

1970년대 한국은 아직 흑백 TV 방송을 하고 있었지만

업체들은 수출용 컬러TV를 생산하고 있었다. / 조선일보 DB

"요 쪼매난 것이 손가방 하나면 몇 만 달러가 된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김 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 주시오!"

1967년 9월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미국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교수 김완희(金玩熙)를 청와대로 불러 트랜지스터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김완희는 세계를 뛰어 다니며 복명(復命)에 몰두했고, 마침내 1968년 8월 1일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조사보고서'를 대통령에게 내놓았다. "국내에서 독자기술을 개발하면 늦고, 선진기술을 도입해 수출 제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거국적인 지원으로 단기간에 전자공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전자공업 종합 5개년 계획이 대통령 재가(裁可)로 마련되고, 이후 한국의 전자산업은 급물살을 탔다.

 

1966년 처음으로 국산 TV를 만들었던 금성사(현 LG전자)가 선두주자로 나섰고, 삼성도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쟁체제에 들어갔다.
1965년 180만 달러였던 전자산업 수출액은 1976년 1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TV와 라디오, 집적회로, 콘덴서, 녹음기, 브라운관 등이 주요 품목으로 떠올랐다. 
   
훗날 김완희는 이렇게 회고했다. "1960년대 말 세계의 전자공업은 막 출발하려던 기차와 같았다. 1970년대를 지나면서 기차의 속도는 빨라졌고 이제 후진국들이 아무리 흉내내며 따라오려 해도 불가능하게 됐다. 우리는 막차 맨 끝 칸을 탔던 것이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8/2008070800095.html

 

[23] 주민등록증 탄생
불온분자 색출 목적… 국민에 일련번호 매겨

▲ 1968년 11월 21일 박정희 대통령이 서울 종로구 자하동 사무소에서

발급 받은 자신의 주민등록증을 들어 보이고 있다.

일련번호는 당시 12자리 번호체계에 의해 110101-100001 이었는데,

생년월일을 나타내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앞자리의 11은 서울, 01은 종로구,

다음 01은 자하동이고, 뒷자리 앞의 1은 성별, 끝의 1은 발급 순서였다. / 조선일보 DB

  

1968년은 향후 대한민국 국민들의 일상 생활을 특징짓게 될 중요한 요소가 출현한 해였다. 이 해 11월 21일 처음으로 발급된 주민등록증은 오랜 세월 동안 '성인식의 전주곡'이었고, 문밖에서 상시 휴대해야 할 '외출 필수품'이었으며, 술값이 없거나 책을 빌릴 때 맡기는 '외상 담보물'이었다. 또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꺼내 보여야 하는 '불심검문의 상징'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호패(號牌)로까지 그 유래가 올라가는 신분증은 6·25전쟁 중 다급하게 만들어진 시·도민증으로 부활됐다. 1962년 5월 '주민등록법'이 공포된 뒤로 새 신분증 발급은 진전을 보지 못했으나, 1968년 1·21사태 직후 법 개정에 속도가 붙었다. 불온분자를 색출하고 주민의 동태를 파악한다는 것이 그 목표였다. 처음에는 번호가 12자리였으나 1975년 13자리가 됐고, 1999년에는 플라스틱 재질로 바뀌었다.

문제는 17세 이상 전 국민의 신상정보가 고스란히 담긴 13자리의 개인 식별번호였다. 범죄 예방과 수사에는 도움이 된 반면, 언제라도 대국민 감시시스템을 만드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었다. 정보화가 진전될수록 주민등록번호를 통한 개인정보 유출의 위험성은 더 커져갔다.

 

주민등록증이 탄생할 무렵 '국민 통합'을 위한 박정희의 노력은 여러 곳에서 드러났다. 1968년 4월 27일 세종로에 이순신 동상을 세웠고, 10월 9일에는 공문서를 한글 전용으로 하도록 했으며, 12월 5일에는 그 뒤 수많은 학생들이 암송하게 될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다. 1969년 4월 28일에는 현충사 중건(重建)이 완료됐다. 그 속에는 애국심, 민족의식의 고취와 지나친 국가주의, 국민 통제라는 명암(明暗)이 모두 존재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9/2008070900025.html

 

[24] 3선 개헌과 40대 기수론
박정희 독재의 길로… 대항마 YS·DJ 떠올라

 

1969년 7월. 3선개헌 반대시위 당시 임시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교문앞에서 연좌시위를 하고있는 고대생들

  

기어이 박정희(朴正熙)는 이승만(李承晩)의 전철을 밟고야 말았다. 헌법을 뜯어고쳐 스스로 세 번 연임할 수 있는 길을 열려 했던 것이다. 1969년의 어느 날, 대통령 박정희는 차기 대선 후보로 여겨지던 43세의 전 공화당 의장 김종필(金鍾泌)을 불렀다. 김종필의 회고에 따르면 대통령은 "조금 남은 일 더 하게 해 줘. 이담엔 임자 차례야. 이번 한번만 더 하겠다는 건데…"라며 그를 설득했다는 것이다.

  

그해 9월13일, 집권 공화당 등 122명의 의원이 서명한 3선 개헌안이 국회 본회의에 회부되고, 야당 의원들은 통과저지를 위해 본회의장에서 취침 농성을 벌이고 있었다. 14일 새벽 2시30분, 의원 122명은 국회 제3별관으로 몰래 자리를 옮겨 5분만에 투표를 끝내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국회의장은 의사봉 대신 주전자 뚜껑을 두드렸다. 10월17일 국민투표에서는 개헌안이 65.1%의 찬성표를 얻었다.

  

개헌안 통과 직후 야당에는 강력한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었다. 11월8일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金泳三)은 "빈사상태를 헤매는 민주주의를 회생시키자"며 '40대 기수론(旗手論)'을 들고 나왔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이듬해 1월24일에는 김대중(金大中)이, 2월 12일에는 이철승(李哲承)이 출마를 선언했다. 김영삼 43세, 김대중 44세, 이철승은 48세였다. 당수 유진산(柳珍山)이 "구상유취(口尙乳臭·입에서 아직 젖 냄새가 남)"라며 폄하했지만 무기력한 야당을 쇄신하려는 그들의 새 바람을 막을 수는 없었다.

   
1971년 4월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김대중은 박정희를 무섭게 추격하며 선전(善戰)했다. '관권 선거'였음에도 불과 95만 표 차이로 가까스로 승리한 박정희는 유세 도중 "다시는 여러분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게 진정 마지막이란 뜻이었을까, 아니면 이후 '10월 유신'과 '체육관 선거'를 염두에 둔 말이었을까. 그걸 알아차린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09/2008070901746.html

 

[25] 경부고속도로 건설 
"하면 된다" 밀어붙인 국토 대동맥(大動脈)

  ▲ 1970년 7월 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 / 한국도로공사 제공

  

▲ 가장 난공사 구간의 하나였던 충북 옥천 금강 제1교 부근 전경

  

그것은 자본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상황에서 오직 "하면 된다" 정신으로 밀어붙인 '박정희 감독작(監督作)'이나 다름없었다. 1968년 2월 1일, 박정희 대통령이 지금의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근처에서 발파 스위치를 눌러, '조국 근대화와 경제개발의 상징'이 될 경부고속도로가 기공(起工)되었다.

 

1964년 서독을 방문했던 박정희에게 충격을 준 것은 확 트인 아우토반이었다. 귀국 뒤 그는 1967년 대선공약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 건설'을 내놓았다.

고속도로? 그런 말조차 생소하던 한국에서는 야당을 중심으로 반대 여론이 일어났다. 

 "부유층의 유람로를 만들려느냐." "1인당 GNP 142달러인 나라에서 그게 왜 필요하냐."

   
그러나 박정희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기공식 석 달 전부터 예산 한 푼 없이 육군 공병단을 투입, 서울-오산 구간의 건설에 들어갔던 것이다.

노선, 공정 계획, 추진 방식을 모두 대통령이 결정했다. 상공부장관 김정렴은 훗날 "대통령이 마치 전쟁처럼 직접 '전투 병사들'을 지휘했다"고 회고했다. 대통령은 공식 스케줄이 없는 날이면 카이저 지프를 타고 흙먼지를 일으키며 현장으로 달려갔다. 가장 어려운 대전~대구 구간 중에서도 당재터널(현 옥천터널)은 지형적으로 험난한 '마(魔)의 구간'이어서 숱한 고초를 겪었다. 2년 5개월의 공사기간 동안 77명이 순직했다.


1970년 7월 7일, 총연장 428㎞(현재는 직선화 등으로 416㎞), 305개(현재 353개)의 교량과 12개의 터널을 포함한 경부고속도로 전 구간이 개통됐다. 계획보다 1년이 앞당겨진 '단군 이래 최대 토목공사'의 완공이었다. 대통령은 "가장 싼 값(1km당 약 1억원)으로 가장 빨리 이룩한 대(大)예술작품"이라며 감회에 젖었고, 샴페인 한 병을 도로에 뿌렸다.
전국이 비로소 '1일 생활권'이 됐으며,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가 열리게 됐다. 한국도로공사는 이 도로의 경제적 편익을 연간 13조 5,500억 원으로 잡고 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0/2008071001778.html

 

[26] 새마을 운동 
농촌에 "잘 살아 보세" 선풍

▲ 새마을 운동 현장을 돌아보는 박정희 대통령

 

▲ 1972년 4월 새마을 깃발 아래 도로 확장 공사에 참여한 농촌 주민들. / 조선일보 DB

  

새마을 운동이 실체를 갖춘 사업으로서 떠오른 것은 1970년 10월 2일의 일이었다. 정부가 전국 동·리마다 시멘트 355포대씩을 지급해 환경 개선을 유도하는 '새마을 가꾸기 운동'을 벌이기로 했던 것이다. 낙후됐던 대한민국 농촌에 일대 "잘 살아 보세" 선풍을 일으켰던 이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운동의 시작은 이렇듯 '시멘트 재고 처분'과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은 아니었다.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은 "공산주의자가 침투할 수 있는 토양으로서의 '빈곤'을 없애려는 대통령의 계산이 있었다"고 말한다.


1971년, 정부가 사업성과를 낸 1만6,000여 마을에만 다시 시멘트와 철근을 지급함으로써 새마을운동은 본격화됐다. 분명 정부 주도의 사업이었지만 그 핵심에는 이처럼 "잘하는 마을만 지원한다"는 원칙이 존재했음을 주목해야 한다. 마을과 마을 사이에 경쟁 원리를 도입했던 것이고, 그것이 바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 정신 중 자조(自助)였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로 시작하는 박정희 작사·작곡의 새마을 노래가 전국 농촌의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가옥을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고(초가집도 없애고) 농로를 확장했으며(마을길도 넓히고) 조림사업을 벌였고(푸른 동산 만들어) 마을회관·창고·축사를 개보수하고 전기와 전화선을 놓았다(알뜰살뜰 다듬세). 1971년 호당 35만 6,400원이던 농가소득은 1981년 368만 7,900원으로 10배 이상 늘었으며(살기좋은 내마을), 그 바탕에는 새마을연수원에서 양성된 농촌 지도자들의 역할이 있었다(우리 힘으로 만드세).


새마을운동이 초가집을 없애는 등 전통문화를 말살했고, 유신체제 유지의 수단이 됐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개발에 따른 농촌 경제의 붕괴를 저지하고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은 현재 좌파 학계에서도 인정하고 있다. 그 성공 요인으로는 ▲ 매우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목표로 신뢰를 쌓게 했으며 ▲종래의 농본주의와는 대립되는 발전주의를 택했다는 점이 꼽힌다. 농민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포퓰리즘이 아니라 경쟁력과 자생력을 키우려 했던 운동이었다는 것이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1/2008071101600.html

 

[27] 전태일 분신사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운동의 불씨로

▲ 1970년 11월 18일 전태일의 장례식에서 어머니 이소선씨가

아들의 영정을 껴안고 오열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30분쯤 22세의 평화시장 재단사 전태일(全泰壹)이 청계천 6가에서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자신의 몸에 휘발유를 뿌려 분신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일보 이상현(李相鉉) 기자에 의해 발견 된 전태일의 일기장 내용이 22일자 주간조선에 특종으로 대서특필됐다.

 

그 특종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존경하는 대통령 각하. 저희들은 근로기준법의 혜택을 조금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전 종업원(2만여 명)의 90% 이상이 평균 18세 여성입니다. 하루 15시간의 작업은 너무 과중합니다. 40%를 차지하는 보조공(시다)들은 15세의 어린 사람들입니다. 저 착하고 깨끗한 동심들을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여 주십시오." 고등공민학교 중학부를 중퇴하고 16세에 평화시장에 들어갔던 전태일이 일기장에 남긴 글에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는 절규도 있었다.

  

그의 분신은 고도성장 시대의 '그림자'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연간 60만 명의 이농자가 도시로 몰려들어 대부분 빈민이 됐고, 이들 중 상당수가 섬유·전기 등 노동집약적 수출 부문에 취업해 장시간 저임금 노동에 시달렸다. 빈민들은 서울 곳곳의 국공유 산지에 판자촌을 형성해 '달동네'라 불렸다.

 

전태일의 죽음과 그가 남긴 일기장은 한국 사회를 노동 문제에 주목하게 했고, 향후 노동운동의 불씨가 됐다. "내게도 대학생 친구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는데…"라는 전태일의 한마디는 숱한 지식인들을 자책하게 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3/2008071300927.html

 

[28] 7.4 남북공동성명 
분단 27년 만에… 이후락 "평양 갔다 왔습니다"

▲ 1972년 7월 4일 서울 의릉 중앙정보부 강당에서

남북공동 성명서를 발표하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 조선일보 DB

 

"중앙정보부장 이후락(李厚洛)입니다. 실은 제가 5월 초 박 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어…."

그 다음 말에 놀라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평양에 갔다 왔습니다."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TV로 생중계 된 기자회견에서였다. 분단 이후 27년 동안 반목해 오던 남·북 정부가 드디어 '소통'을 시작한 것인데,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곧바로 '통일'을 위한 공동성명을 평양과 동시에 발표했던 것이다.

  

1972년 5월 2일, 이후락은 정치적 회담을 위한 밀사로 파견됐다. 그는 떠나기 전 청와대를 들러 상의 주머니를 가리키면서 "그것도 여기 준비해 갑니다."고 말했다. 유사시에 자결하기 위한 청산가리였다.

  
4일 새벽 1시, 이후락이 모란봉초대소에서 차를 타고 비가 쏟아지는 비포장 산길을 지나 닿은 곳은 김일성(金日成)의 관저였다. 김일성이 악수를 청할 때 이후락은 당황했다. 손에 쥐었던 청산가리 캡슐이 녹아 달라붙었기 때문이다.

이후락은 "그때 내 태도가 수상했던지 김일성이 멈칫하더라."고 술회했다. 29일에는 북한 부수상 박성철(朴成哲)이 극비리에 서울을 방문, 박정희를 만났다.


7·4 남북공동성명은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을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천명하고, 긴장상태를 완화하며 다방면의 교류를 실시하기로 합의했음을 밝혔다. 8월부터는 남북적십자회담 본회담이 열리기 시작했다. 적잖은 사람들이 금세 통일이 이뤄질 것으로 믿었다. 그러나 북한이 개혁 개방의 의사 없이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개최 등 정치적 공세를 앞세웠고, 해빙의 분위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숱한 희망과 배신, 설렘과 속임수로 점철된 기나긴 남북대화의 시작이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5/2008071500029.html

 

[29] 10월유신 
헌정(憲政) 중단... 체육관 선거 시작

 

  ▲ 유신헌법이 공포된 1972년 12월 27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8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취임 선서를 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72년 10월 17일은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무척 평범하고 평온한 날처럼 보였다. 그날 저녁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갑작스러운 비상조치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며 정치활동을 중단시키고, 열흘 안에 새 헌법을 공고한다는 내용이었다. 언론·출판·방송엔 사전 검열이 실시됐다. 한 마디로 '헌정(憲政) 중단'이었다.

  

소요나 시위가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북한이 무력 도발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사실상 대통령의 종신 집권을 가능케 했던 이 10월 유신(維新)체제는 대통령 자신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유신(維新)이란 시경(詩經)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거기서 어렵지 않게 일본의 메이지(明治)유신을 떠올렸다. 10월 27일에 공고된 유신헌법은 11월 21일 비상계엄령하의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이 헌법은 대통령에게 긴급조치권, 국회해산권을 부여했고 국회의원의 3분의 1(유정회)과 법관의 임명권도 대통령이 갖게 했지만 국회는 대통령을 탄핵할 수 없게 했다.

    
12월 15일에는 대통령을 뽑는 권한을 갖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의 선거가 치러졌다. 등록 과정에서부터 정부의 통제하에 있었던 이들 대의원 2,359명은 12월 23일 장충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의 시작이었다. 단독 출마한 박정희는 2,357명의 지지를 받아 임기 6년의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1972년 12월 27일 유신헌법은 공포되고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이제 대통령은 어떠한 국가기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절대 권력을 지니게 된 반면 대의(代議)민주주의의 정치 원리는 희미해졌다.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으로 확립된 이 새로운 체제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꼭 하고 싶었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새로운 성장 산업'의 추진이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5/2008071501697.html 

  

[30] 중화학공업화 선언 
눈물과 땀... 한강의 기적 꽃피워

 

▲ 1976년 5월 31일 포항제철 제2고로 화입식(火入式)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박태준 포철 사장과 함께 불을 넣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73년 1월 12일 연두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重化學工業化)'를 선언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31일 경제제2수석비서관 오원철(吳源哲)로부터 네 시간 동안 브리핑을 들었다.
"공업구조를 개편하고 산업을 확대해야 합니다. 종합화학공장과 조선소, 기계공업을 육성하고, 최신 기술과 대규모 공장을 마련하는 게 필요합니다. …중화학공업과 방위산업을 동시에 건설해서 북한이 따라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박정희는 드디어 지시를 내렸다. "필요한 외자도입 조치를 하시오!"

  

그 회의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 1인당 GNP 320달러(1972년)의 나라가 조선·전자·기계·제철·자동차·석유화학·원자력 등 기술집약적인 핵심산업을 모두 진흥하는 엄청난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대통령 비서실장 김정렴(金正濂)과 중화학공업기획단장 오원철이 핵심 역할을 맡았고,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분야당 1-2개의 민간업체를 선정해 부지와 도로, 자금을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1973년 7월 3일, 한국 중화학공업의 상징과도 같은 연산 103만t 규모의 포항제철이 3년 만에 준공됐다. 첫 쇳물이 쏟아지자 사장 박태준(朴泰俊) 이하 직원들은 만세를 부르며 눈물을 쏟았다.
포철의 규모는 1978년 550만t, 1981년 850만t으로 급증했다.

  

박정희는 조선소 건설을 기권하려는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鄭周永)을 독려했다. 유럽으로 날아간 정주영은 500원 지폐의 거북선을 보여주며 "우리는 수백 년 전에 이런 배를 만들었다"며 배짱을 부린 끝에 차관을 얻어냈다. 현대조선소는 1975년에 준공됐다. 1976년에는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해외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선진국에서 수십 년 또는 100년 이상이 걸린 산업구조의 변화가 대한민국에선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일어났다. 1973∼1979년 한국의 제조업은 연평균 16.6%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1980년 전체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의 비중은 54%가 됐다. 1965년 필리핀의 절반에 불과하던 한국의 1인당 GNP(106달러)는 1979년 1,745달러로 필리핀의 세 배였다.

한강의 기적이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7/2008071700023.html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4)
  

 

조선일보가 대한민국 건국(建國) 6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연재한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사 원문은 각 항목 끝에 [원문보기]로 연결하였습니다.

 

  

[31] 청년문화와 장발 단속
미니스커트. 장발은 '저항의 상징'

 ▲ 1976년 6월 7일 거리를 지나던 행인이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려 조사를 받고있다.  / 조선일보 DB

  

▲ 1973년 3월 10일 한 경찰관이 젊은 여성의
치마와 무릎 사이의 길이를 자로 재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73년 3월 10일 발효된 '개정 경범죄 처벌법'에 따라 경찰은 가위와 자를 들고 장발과 무릎 위 17cm 이상 미니스커트에 대한 집중 단속에 들어갔다. 그 해에만 1만2,870명이 장발 단속에 걸려 대부분 강제로 머리를 깎였다.

  

급속한 경제 성장과 함께 한국 사회의 문화적 지형도도 바뀌어 가고 있었다. 1970년대 초, 유신체제의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도 대학가를 중심으로 통·블·생(통기타·블루진·생맥주)으로 상징되는 청년(靑年) 문화가 대두했다.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장발과 미니스커트는 소극적인 저항의 코드인 동시에 국가적 훈육의 대상이 됐다. 박정희 정부는 자신들이 이룩한 경제적 토대 위에서 벌어지는 예측하지 못했던 변화에 당황하고 있었고, 경제개발의 수혜를 입고 문화를 향유하기 시작한 젊은 세대들은 그 개발의 주체에 대해 반항을 시도하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8/2008071800062.html

   

  [32] 오일쇼크와 中東진출
허리띠 졸라매고 사막에서 금(金)을 캐다

 

   ▲ 중동 건설 붐이 한창이던 1976년

이란 코람샤의 부두 공사장에서 일하는 한국 기술자들이 손을 맞잡고 있다. / 조선일보 DB

   
"난방 유류의 5%를 절감하고, 2㎞ 정도는 걸어가는 운동을 펼친다. 대낮 소등(消燈)을 생활화하며, 광고 네온사인과 목욕탕 신규 허가를 규제한다."
1973년 11월 8일, 정부는 '에너지 소비절약 1단계 조치'를 발표했다. 그 해 10월 제4차 중동전쟁이 유발한 제1차 오일쇼크는 막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 한국 경제에 큰 위기를 몰고 왔다. 2.8달러이던 유가는 다음해 3월까지 11달러로 네 배가 뛰었다.

 

석유 사용을 10% 줄이자는 강력한 운동이 펼쳐졌다. 관공서는 전구 3분의 1을 빼냈고, TV 방영은 하루 4시간 단축돼 아침방송이 없어졌다. 1974년 1월 14일의 긴급조치 3호는 저소득층의 부담을 줄이고 TV와 냉장고를 포함한 '사치품'에 대한 과세를 늘렸다. 대통령도 여름에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연 채 파리채를 들고 살았다.

 

그것은 대단한 효과를 거뒀다. 1974년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8.1%였고, 수출은 전년 대비 38.3%가 늘었으며, 국민총생산 실질 증가율은 7.1%였다. 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기간(1972∼1976) 동안 연평균 성장률은 11%였다.

 

대한민국은 이 시점에서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과감한 역(逆)발상을 하게 된다.
중동에 석유 값으로 낸 돈을 다시 찾아오자는 것이었다. 월남에서 철수한 한국 기업들은 대거 중동으로 진출했다. 절정을 이룬 1978년 열사(熱砂)의 땅에서 소금땀을 흘린 한국 노동자는 14만명이 넘었다. 1975년에서 1979년까지 중동에서 벌어들인 205억 달러는 같은 기간 총 수출액의 40%에 육박했다.

 

그 경험들은 1978년부터 1981년까지 이어진 제2차 오일쇼크를 극복할 수 있었던 토양이 됐다.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한국인들은 싼 석유값이 주는 풍요에 젖어 들었고, 에너지 절약은 먼 과거의 추억으로만 남게 됐다. 마치 그런 위기는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듯이.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19/2008071900057.html

 [33] 육영수 여사 피살
광복절, 육여사가 쓰러지고 2분 후 박정희 "하던 얘기 계속하겠습니다"

 

 ▲ 1974년 8월 15일 서울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의 저격 직후

경호원들이 연대 뒤의 박정희 대통령을 호위하고 있는 가운데

피격당한 대통령 부인 육영수 여사가 쓰러져 있다.

조선일보 사진부 임희순 기자의 이 특종 사진은

다음날 신문에 게재되지 못하고 6일 뒤에야 실렸다. / 조선일보 DB

서울에 지하철 1호선이 처음으로 개통된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 기념식이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중요한 연설문을 읽고 있었다.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공산권에 대한 문호 개방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을 제의한 1973년의 6.23 선언에 이어, 이번에는 북한에 불가침조약을 제의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오늘 이 뜻 깊은 자리를 빌어서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그때 장내 어딘가에서 "퍽" 소리가 났다. 맨 뒷줄에 앉아있던 20대 남자 한 명이 들고 있던 권총을 자기 허벅지에 오발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 동안 시종…."
대통령의 연설이 계속되는 순간 사내는 통로로 나와 연단을 향해 뛰어갔다. 갑작스런 사태에 놀란 청중이 와∼하는 함성을 지르는 순간, 연단 뒤쪽에 앉아 있던 경호실장 박종규(朴鐘圭)가 총을 들고 뛰어나왔고, "탕" 하는 두 번째 총성이 들렸다. 총탄은 대통령 앞의 연대를 맞췄다. 대통령은 연대 뒤로 몸을 숙였고, 세 번째 총성 직후 연단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통령 부인 육영수(陸英修)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범인은 한 청중이 내민 발에 걸려 넘어져 제압당했고, 식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경호원들이 대통령을 에워쌌다. 모든 것이 순간적이었다.
2분 뒤, 대통령은 다시 연대 위로 모습을 드러냈고 침착한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육 여사는 그날 저녁 7시쯤 운명했다. 범인으로 붙잡힌 재일교포 문세광(文世光)은 조총련을 통해 북한과 접촉, 박정희 암살의 지령을 받았으며 일본인의 여권을 위조해 입국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넉 달 뒤 사형에 처해졌다.

  

대통령은 암살을 모면했지만, 평소 국민의 신망을 얻고 있던 대통령 부인이 서거했기에 사람들의 충격과 슬픔은 컸다. 8월 19일 청와대 앞뜰에서 열린 발인식이 끝나자, 대통령은 청와대 정문을 붙잡은 채 운구행렬이 경복궁을 돌 때까지 묵묵히 지켜 봤다.

다음해 5월 21일 신민당 총재 김영삼(金泳三)과의 회담에서 창 밖에 새 한 마리가 홀로 날아오자, 대통령은 "내 신세 같다"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1/2008072100052.html

  

 [34] 통일벼와 식량 자급
녹색혁명… 수천 년 굶주림에서 벗어나다

   

▲ 1974년 경기 수원 농촌진흥청에 모인 사람들이

쌀 3,000만석 돌파를 축하하는 행사를 벌이고 있다. / 농촌진흥청 제공

1970년대 들어 '보릿고개'라는 말이 과거의 유산으로 사라지게 된다. 그 배경에는 적극적인 식량 증산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식량자급이야말로 가난 추방의 첫걸음이자 국가안보의 요체라고 여겼던 대통령 박정희는 1960년대 중반 신품종 개발을 지시했다.

  

1971년, 농촌진흥청이 동남아 신품종을 개량해 내놓은 새로운 볍씨의 재배가 시작됐다. 정식 명칭 IR667-98-1-2인 이 벼를 사람들은 '통일벼'라 불렀다. 보통 벼는 이삭 하나에 낱알이 80-90개였지만 통일벼는 120-130개가 보통이었고 200-300개가 되기도 했다.
농민들은 "못자리 때 싹이 안 터서 울었지만, 엄청나게 벼를 쏟아내는 걸 보고 웃었다"고 말했다.(제1회 조선일보 논픽션대상 당선자 이완주씨 증언)

 

통일벼는 점차 한국 토양에 적합한 다수확 품종으로, 쌀 생산량은 1974년 3,000만석을 돌파했으며, 1975년에는 마침내 쌀 자급(自給)이 달성됐다. 쌀 4,000만석을 돌파한 1977년에는 전국 벼 평균수량이 1,000㎡당 494㎏으로 '단군 이래 최고 수량'을 기록했다.
동남아 국가들이 신품종을 개발해 식량을 증산한 '녹색혁명(Green Revolution)'을 대한민국도 이뤄내게 됐던 것이다.

녹색혁명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비로소 수천 년 동안의 굶주림에서 벗어났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2/2008072200128.html

 [35] 유신체제의 위기
긴급조치 남발… '민주주의 암흑기' 오명

▲ 1974년 1월 8일 지나가던 시민들이 조선일보 속보판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이 날 발동된 긴급조치 1호의 내용을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한 뒤 야당과 재야세력은 본격적인 반(反) 유신투쟁에 나섰다. 학생 시위가 확산됐고, 12월 24일에는 김수환·천관우·김동길·법정·함석헌·장준하 등이 주축이 된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이 펼쳐졌다.

  

저항에 직면한 대통령 박정희는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에 보장된 '긴급조치'의 제1호를 발동했다. 헌법을 반대하거나 개헌을 주장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내용이었다. 같은 날의 긴급조치 2호는 위반자 처벌을 위한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했다.

 
4월 3일에는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된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됐고, 1975년 2월 12일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는 79.8%의 투표율과 73.1%의 지지율을 보였다. 4월 8일에는 고려대에 휴교령을 내린 긴급조치 7호가 발동되고, 5월 13일 마침내 긴급조치의 결정판인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됐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이 조치를 비방하는 행위조차 금지됐다.

 
4년 동안 이어진 긴급조치 9호를 통해 박정희는 상대적으로 정국이 안정된 상태에서 중화학공업화를 계속 추진할 수 있었지만, 민주주의의 암흑기라는 비판을 받았다.

 

1975년 4월의 월남 패망 이후 안보 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 1976년 8월 18일에는 북한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일어나 한반도에 전운이 감돌았다. 1977년 초에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Carter)는 한국의 인권상황을 비판하는 한편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발표했다. 한·미 관계의 악화로 인해 유신체제의 위기가 심해지게 됐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2/2008072201807.html

[36] 수출 100억弗 돌파
10억달러 이룩한 지 7년만에… 온나라 열광

▲ 1977년 12월 광화문 네거리 대형 아치에 붙은‘100억불 수출의 날’표지판. / 조선일보 DB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드디어 우리는 수출 100억 불을 돌파했습니다."
1977년 12월 22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온 나라가 흥분에 빠졌다. 100억 달러! 쉽게 믿어지지 않을 숫자였다. 경제개발계획을 시작하던 1962년의 수출액은 5,000만 달러였고, 1964년에야 1억 달러를 달성했었다. 10억 달러를 넘은 것은 1970년의 일이었다.

100억 달러 돌파는 '한강의 기적'이 비로소 결실을 맺었다는 상징과도 같았지만 대통령은 그날 이렇게 말했다.
"이 기쁨과 보람은 결코 기적이 아니요, 국민 여러분의 고귀한 땀과 불굴의 집념이 낳은 값진 소산이며, 일하고 또 일하면서 살아 온 우리 세대의 땀에 젖은 발자취로 빛날 것입니다."

 
박정희는 그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10억 불에서 100억 불이 되는 데 서독은 11년, 일본은 16년이 걸렸다. 우리는 불과 7년이 걸렸다.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자. 새로운 각오와 의욕과 자신을 가지고 힘차게 새 전진을 다짐하자.'

  

1970년대 한국의 국가적 목표는 "10월 유신, 100억 불 수출, 1000불 소득"이란 정부의 구호로 표현됐다. 일부에선 공허한 선전이라고 여겼으나, 수출과 1인당 국민소득 모두 목표보다 4년이 앞당겨진 1977년에 성취됐다. 그해 6월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한국인들이 몰려온다'는 커버스토리를 실었다.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신호탄이었다.

2007년 한국의 총수출액은 3,714억 달러였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4/2008072400076.html

   

[37] 10.26 사태
궁정동 안가(安家)·김재규·박정희 대통령…
탕! 탕!…  한 시대의 종언(終焉)
 

▲ 1979년 11월 7일 10.26사태 현장 검증에서 전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권총을 들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두 번째로 총을 쏘는 순간을 재연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 1979년 10월 26일 10.26사태 직후의 궁정동 안가 현장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62세의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헬기를 타고 청와대로 돌아오다가 서울 상공을 한 바퀴 돌게 했다.
마치 그가 지난 18년 동안 이뤄놓은 한강의 기적을 눈에 담아두려 하는 것 같았다.
그 전날, 대통령은 청와대 뜰을 거닐다 낙엽 하나를 줍더니 쓸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고 한다.
"오동나무 낙엽 하나가 가을이 깊어 감을 알린다고 했는데…."

 

제9대 대통령 취임식 다음 해인 1979년, 유신체제의 위기는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8월에는 YH무역의 여성 노동자들이 폐업 조치에 항의해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이다 경찰의 진압 과정에서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6일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유신 반대 시위가 일어났고, 18일 부산에 계엄령이 선포됐다.
현장을 지켜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는 강경 진압을 고집한 경호실장 차지철(車智澈)에게 큰 반감을 품게 됐다.


26일 오후 6시 5분, 박정희는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김재규·차지철과 함께 만찬 자리에 앉았다.
40분쯤 지나 자리를 빠져 나온 김재규는 부하들을 불렀다.
"오늘 저녁에 내가 해치운다."
"…각하까집니까?"  김재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7시 40분, 박정희가 합석한 가수 심수봉(왼쪽 사진)의 반주로 모델 신재순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을 때, 김재규는 욕설을 내뱉으며 차지철의 팔에 권총을 발사했다.
"뭣들 하는 거야!"(박정희)    "경호원, 경호원!"(차지철)

  

김재규는 4, 5초 동안 머뭇거리다 정좌한 채 눈을 감은 박정희의 가슴에 총을 쐈다. 김재규의 부하들은 대기실과 주방에서 경호원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총이 고장 나 김재규가 밖으로 나간 사이 심수봉과 신재순이 박정희를 부축했다. "각하, 괜찮습니까?" 등에서 피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박정희는 그대로 앉은 채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괜찮아…." 잠시 후 부하의 권총을 빼 들고 와 차지철을 쏜 김재규는 대통령의 머리 50cm까지 총을 들이댄 뒤 방아쇠를 당겼다.

한 시대가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4/2008072401327.html

  [38] 12․12 쿠데타
너무나 짧았던 '서울의 봄'

▲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내란방조혐의로 자신이 지휘하던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납치.연행된 뒤 1980년 1월 15일 수갑을 찬 채 헌병의 호송을 받으며 조사를 받으러가고 있다.

"이놈들! 내가 계엄사령관인데 누가 그따위 지시를 하던가?"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쯤 서울 한남동 육군참모총장 정승화(鄭昇和)의 공관에 신군부측 허삼수(許三守)·우경윤(禹慶允) 두 대령이 찾아왔다.

 
"총장님, 조사할 게 있으니 저희 녹음실로 가시죠." 함께 온 보안사 수사관들은 전화를 돌리는 총장의 부하들에게 네 발의 총을 쐈다. 군인 한 명이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M16소총으로 정승화를 후려쳤고, 33헌병대 병력 60여 명이 공관으로 난입했다.

 

총성과 함께 역사는 47일 전만 해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10·26 사태로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은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에게 실권이 집중됐다. 사조직 하나회가 중심이 된 전두환의 신군부(新軍部)는 10·26 당시 정승화가 사건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것 등을 근거로 그를 강제 연행했다. 하극상이었다.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崔圭夏)는 "국방장관 불러오라"며 정승화 체포 재가(裁可)를 새벽까지 거부했고, 그 사이 신군부측 1공수여단 병력이 육군본부와 국방부를 점령했다. 사단장 노태우(盧泰愚)의 9사단 병력은 중앙청으로 진입했다. 신군부는 군권(軍權)을 장악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2월 21일 유신헌법에 의해 최규하가 제1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대한민국의 1980년대는 유신이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는 기대와 함께 시작됐다.

2월 29일에는 오랜 연금 생활을 겪었던 전 대통령 후보 김대중(金大中)이 복권됐다. 신학기가 되자 대학생들은 정부의 이원집정제(二元執政制) 구상을 사실상 유신체제를 연장하려는 것으로 판단하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5월 15일 서울역 광장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10만여 명의 학생이 운집했다.

 
1980년 5월 18일 0시. 신군부는 사회불안을 진정시킨다는 명분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조치를 단행하고 2만5,000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서울의 봄'은 너무나 짧았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5/2008072501469.html

 [39] 5.18 光州 민주화운동
 신군부 집권 기도에 피로 맞선 시민들  

▲ 1980년 5월 20일 전남 광주시 금남로에서

시위대와 진압군이 도로를 가득 메운 채 대치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80년 5월 18일.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김대중(金大中)은 체포됐고 김영삼(金泳三)은 가택 연금됐다.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은 정국을 장악했다. 전국 주요 지점으로 출동한 군 병력 중 7공수여단 33·35대대는 전남 광주(光州)로 향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전남대 교문 앞에서 학교를 점령한 33대대와 학생 200여명 사이에 충돌이 벌어졌고,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진압했다. 학생들은 금남로에 집결한 뒤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선생 석방하라"고 외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요청으로 시위 현장에 투입된 공수부대는 진압을 시작했다. '여학생의 가슴을 도려내 죽였다'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됐고, 진압에 분노한 시민들은 학생과 함께 저항에 나섰다. 19일 계엄군은 처음으로 발포했고, 반격에 나선 시위대에 의해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광주 KBS와 MBC 건물이 불탔다.

 

5월 20일 시위대 수만명과 계엄군은 금남로에서 대치했다. 21일 시위대는 탈취한 시내버스와 장갑차를 몰아 돌진했고, 계엄군은 시위대에 본격적인 발포를 시작했다. 시위대는 경찰서와 파출소 등에서 무기를 탈취해 무장했다. 진압군은 시 외곽으로 철수했고 시위대는 전남도청을 점령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무기 반납 문제를 둘러싸고 강·온파로 나눠 대립했다. 27일 새벽 4시, 계엄군은 대대적인 무력 진압에 나서 도청을 탈환하고, 5시 21분에 상황은 종료됐다.

1995년 서울지검과 국방부 검찰부는 광주 시위 관련 사망자 수는 민간인 166명, 군인 23명, 경찰 4명 등 모두 193명이며, 행방불명 47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신군부의 부당한 집권기도에 대한 저항이었던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한국현대사의 치명적인 상처로 남아 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7/2008072700533.html

 [40] 제5공화국 출범
 또 다른 '공포정치'의 시작

▲ 1981년 3월 3일 서울 잠실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제12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전두환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씨가 참석 인사들의 박수에 답례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79년 '12·12' 이후 신군부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1980년 5월 31일 신군부의 주도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발족했고, 보안사령관 전두환(全斗煥)이 상임위원장을 맡았다. 국보위는 7월 9일 고위 공무원 232명을 숙정했고 30일에는 과외 금지 조치를 발표했으며, 8월부터 11월까지 불량배 소탕을 명분으로 3만8,000여명을 군사시설 삼청교육대에 수용했다. 8월 8일에는 AP통신이 "미국은 전두환 장군이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된다면 지지할 것"이라는 미국 관리의 말을 보도했다. 그 익명의 관리는 존 위컴(Wickham) 미 8군사령관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제 전두환을 견제할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통령 최규하(崔圭夏)는 8월 16일 하야 성명을 발표했고, 국무총리서리 박충훈(朴忠勳)이 보름 동안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22일 예편한 전두환은 유신헌법에 의해 9월 1일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9월 11일, 김대중(金大中)에게 내란음모죄 등으로 사형이 구형됐다. 29일, 국보위의 주도로 마련된 헌법 개정안이 공고됐다. 새 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대통령선거인단으로 바뀌었을 뿐 대통령 간접 선거라는 점에서는 유신헌법과 비슷했지만, 대통령 임기는 7년이되 중임(重任) 불가라는 점이 달랐다.

  

새 헌법이 공포되던 10월 27일, 계엄군이 비리 조사를 구실로 전국 사찰에 투입돼 승려들을 연행·폭행하고 서류를 압류한 '10·27 법난(法難)'이 일어났다. 11월 하순에는 전국 신문·방송·통신사 45개사의 매체를 없앤 언론통폐합이 단행돼 TBC는 KBS에, 신아일보는 경향신문에 흡수 통합됐다. 전두환이 선거인단 5,271명 중 90.2%의 지지로 제12대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해를 넘긴 1981년 3월 3일의 일이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8/2008072801247.html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5)
  

 

조선일보가 대한민국 건국(建國) 6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연재한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사 원문은 각 항목 끝에 [원문보기]로 연결하였습니다.

 

[41] 프로야구 출범
관중 150만명 돌파.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아.
   

   

 ▲ 1982년 3월 27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개막식.
 

1982년 3월 27일 오후 2시25분, 서울운동장 프로야구 개막전에 모인 3만여 명의 관중은 깜짝 놀랐다. 대통령 전두환이 직접 시구를 하러 마운드에 나타났던 것이다. 경호원이 심판으로 위장해 옆에 섰다.

"각하께서는 육사시절 축구부 골키퍼를 맡으시면서 주장을…" (해설자)

"아~ 인코스!" (아나운서)

 

1980년 12월 컬러 TV방송을 시작했던 전두환 정부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정책들을 잇달아 내놓았다. 1981년 5월에는 대규모 관제(官製) 민속문화 축제인 '국풍 81'이 여의도에서 열려 1,000만 명의 관객을 모았다. 1982년 1월 2일에는 중·고생 교복·두발 자유화 조치가 발표됐고, 6일부터는 미 군정 이후 36년 만에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됐다.


프로야구는 첫해 150만 관중을 돌파, 단숨에 최고 인기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소설가 박민규는 훗날 "어린이에겐 꿈을! 젊은이에겐 낭만을! 이란 프로야구의 구호는 사실 어린이에겐 경쟁을! 젊은이에겐 더 많은 일을! 이란 말이었다"고 말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30/2008073000091.html

  

[42] KAL기 피격과 아웅산 테러 사건
냉전의 그늘… 잇따른 비보(悲報)

▲ 1983년 10월 9일 테러 참사를 몇 초 앞둔 순간

버마(현 미얀마) 랑군(현 양곤) 아웅산 국립묘지에 도열한 수행원들의 모습.

왼쪽부터 함병춘 대통령 비서실장, 이계철 주 버마대사, 서상철 동자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이범석 외무부 장관, 서석준 부총리. 이들은 모두 사망했다.

중상을 입은 최금영 연합통신 사진부장이 사진기 테스트를 위해 촬영한 사진으로

폭발사고 당시 촬영자의 피와 화약흔 때문에 사진 일부가 하얗게 바랬다.

  

남한 인구가 4,000만 명을 넘어선 1983년. 그해 5~6월에는 전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 23일 동안 민주화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벌였고, 6월부터 11월까지는 KBS의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으로 1만189명이 상봉했고, 전 국민이 눈물바다에 잠겼다.
 

대한민국 역사상 큰 비극으로 남은 두 사건이 일어난 것도 그해였다.
9월 1일, 미국 뉴욕에서 앵커리지를 거쳐 서울로 오던 대한항공(KAL) 007편 여객기가 사할린 상공에서 격추됐고, 탑승자 269명(한국인 110명) 전원이 사망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정규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으로 들어간 KAL기는 3시25분 소련군 수호이 15 전투기가 발사한 미사일에 맞았다. 군대가 비무장 민간항공기를 공격해 승객들을 살해한 만행이었으나 진상은 여전히 베일 속에 있다.

KAL기를 격추한 소련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는 2003년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최종 명령은 모스크바에서 하달됐으며, 추락 지점에서 발견된 시신은 6~7구뿐이었다"고 말했다.

  
38일 뒤인 10월 9일, 6개국 순방길에 올랐던 대통령 전두환은 버마(현 미얀마) 랑군(현 양곤)에서 아웅산 국립묘지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이날 아침 행사장 안내를 맡은 버마 외무장관이 차 고장으로 5분 늦게 영빈관에 도착했다. 대통령의 차가 행사장을 향해 가고 있던 오전 10시28분(현지시각),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테러 폭탄이 터졌다. 미리 와 있던 부총리 서석준, 외무부장관 이범석, 대통령 비서실장 함병춘, 경제수석비서관 김재익 등 정부 고위 인사를 포함한 17명이 순직했다.

 

폭탄을 설치한 범인들은 김정일의 지령을 받은 북한 정찰국 특공대 소속인 것으로 밝혀졌다. 공작원 3명 중 신기철은 사살됐고 진모는 사형이 집행됐으며, 유일한 생존자였던 강민철은 2008년 5월 미얀마 감옥에서 죽었다. 전두환은 훗날 "격분한 군 지휘관들이 육·해·공군 할 것 없이 북한을 때리려고 해서 전방을 돌면서 말렸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버마는 이후 북한과 24년 동안 단교했고, 대한민국은 제3세계와의 외교관계에서 북한을 앞지를 수 있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30/2008073001608.html

[43] 3低호황과 중산층의 성장
단군이래 가장 들뜬 경제… 아파트·마이카 시대 열려

▲ 서울의 대표적인 중산층 타운이 된 목동 아파트단지(1984년 착공, 1989년 완공)가

건설되고 있던 1985년 11월의 모습.

1980년대 대한민국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무려 10.1%였다. 5공 정부는 경제정책의 전환을 시도했다. 중화학공업의 구조조정과 시장 논리에 따른 경제 자율화를 추진했으며 중소기업을 육성했다. 정권 초부터 경제수석비서관 김재익(金在益)과 같은 인재를 등용, 한 자릿수 물가에 뛰어들었다.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986년부터 올림픽의 해 1988년까지, 한국 경제는 이른바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好況)을 맞게 된다. 저(低)달러(엔고), 저유가, 저금리라는 국제시장의 3저(低)현상이 한국 제품의 경쟁력을 강화했고, 개항이래 처음으로 무역수지가 흑자로 돌아서게 됐다. 이 시기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한국 경제가 드디어 자립경제를 성취했다."는 시각이 있는가 하면, "일시적 착시로 인해 고비용·저효율 구조를 고착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1980년대 중반 중산층 의식을 가진 사람은 75%에 이르렀다는 통계도 있다. 주택 500만호 건설의 구호와 함께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가 열렸고, 1985년 자동차 보유 100만 대를 넘으면서 마이카시대도 눈앞에 두게 됐다.

  

이제 새로운 계층에게 제5공화국의 권위주의 정치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이 되고 있었다. 미국으로 망명했던 김대중(金大中)이 1985년 2월 8일 귀국했고, 12일의 12대 총선에선 갓 창당한 신민당이 여당을 6% 차로 추격했고,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 운동이 확산됐다. 그리고 1987년이 밝았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31/2008073101524.html

 

[44] 6․10 민주항쟁
탁 치니 억하며…  100만명 피플파워에 무릎꿇은 철권통치

▲ 1987년 6월 26일, 부산에서의 직선제 개헌 요구 시위에서 대형 태극기 앞에서

웃통을 벗은 한 청년이 “최루탄을 쏘지 말라”며 뛰어가고 있다.(고명진 기자 촬영). / AP자료사진

  

"모서리가 없는 둔탁한 부위에 눌리고 폐에 물이 찼습니다. …흉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입니다."
1987년 1월 15일,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을 끝낸 국립과학수사연구소 법의1과장 황적준이 서울지검 당직검사 안상수에게 말했다.

 
하루 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경찰 조사 중 사망한 서울대생 박종철의 사인(死因)이 물고문으로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앉아 있다가 갑자기 '억'하고 쓰러졌다"며 쇼크사로 은폐하려던 경찰의 음모와 함께, 5공 정권의 폭력성과 비도덕성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5월 18일 박종철 사건 축소·은폐의 진상은 폭로되었다.

 

6월 2일, 전두환은 민정당의 13대 대통령 후보로 육사 11기 동기인 노태우를 지명했다. "두려움으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각하, 끝까지 지도해 주십시오." (노태우)
6월 9일, 연세대생 이한열이 시위 중 경찰이 발사한 최루탄을 맞고 쓰러졌다.

 
마침내 민정당이 잠실체육관에서 대통령 후보 선출식을 열던 10일, 40만 명의 학생과 시민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그날부터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는 "호헌 철폐, 독재 타도!"라는 구호와 함께 전국의 33개 도시로 확산됐으며, 26일에는 전국에서 100만 명 이상이 시위에 나섰다. 국민이 대통령을 직접 뽑을 권리와 대의민주주의의 원칙을 지키기 위한 운동이었다.

  
사태는 심각했다. 6월 19일 오전, 전두환은 군 고위 지휘관들을 청와대로 소집하고 군병력 배치 계획을 결정했다. "내일 새벽 4시까지 전부 진압해요."
오후 2시, 주한 미국대사 제임스 릴리가 전두환을 찾아와 미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계엄령 선포는 한·미 동맹을 저해할 수 있으며 1980년 광주 같은 불행한 사태를 재발할 수 있습니다…." 오후 4시30분, 계엄령은 유보됐다.  5공화국은 사면초가였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2/2008080200016.html

 

[45] 6.29와 87년 大選
5共의 항복 선언… 갈라선 양김(兩金)

▲ 1987년 11월 23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직원들이 13대 대통령 선거 입후보자들의

포스터를 검토하고 있다. 선거 결과 득표율은 번호 순서대로였고,

1·2·3번의 순서대로 대통령이 됐으며, 4번은 국무총리를 두 번 지냈다. / 조선일보 DB

 

"직선제 개헌, 김대중씨 사면복권, 시국사범 석방, 국민 기본권 신장 등을 대통령께 건의하겠습니다."
1987년 6월 29일. 독자적인 구상인 것처럼 갑작스럽게 나온 노태우의 선언에 국민들은 깜짝 놀랐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5공 정부의 대(對)국민 항복으로 받아들였고, 전국은 일시에 축제 분위기가 됐다. 이로부터 권위주의 청산이 시작됐고 시민사회가 성장했다.

 

여야 합의로 마련된 새 헌법은 10월 27일의 국민투표에서 93.1%의 지지로 확정됐다. 대통령 선거방식을 직선제로 바꾸고 대통령의 임기를 5년 단임으로 했으며 국민 기본권을 신장한 이 '6공 헌법'은 지금까지 20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16년 만에 대통령을 직접 뽑을 수 있게 된 현실에 국민들은 환호했다.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던 김종필도 출마해 '1노(盧) 3김(金)'의 4파전을 이뤘다.
김영삼·김대중 양김(兩金)은 끝내 단일화에 실패하고 갈라섬으로써 국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오던 KAL-858기가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공작원들에 의해 공중 폭발, 탑승객 115명이 사망하는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위대한 보통사람, 믿어 주세요!"를 외친 노태우는 12월 16일의 대선에서 36.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양김의 표를 합하면 노태우보다 416만표가 많았다. "노 후보를 당선시킨 것은 5김(3김과 KAL기 폭파범 김승일·김현희)"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노태우는 1988년 2월 25일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해 제6공화국이 출범했다.

 

전 대통령 전두환은 5공 때의 비리가 쏟아지면서 사실상의 '유배'를 떠나야 했는데, 1989년 8월 백담사에서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김재규 이후 우리는 배신하는 게 하나의 나쁜 전통이 돼 버렸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4/2008080400034.html

 

[46] 서울올림픽
분단의 땅에 펼쳐진 인류의 제전

 

▲ 1988년 9월 17일.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성화가 타오르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88년 9월 17일 12시21분. 잠실 주경기장에서 올림픽기가 게양되자 성화 주자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남문으로부터 뛰어들어 왔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52년 전 민족의 한(恨)을 품고 우승대에 섰던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영웅 손기정이었다. 곧 이어 정선만(교사), 김원탁(마라톤 선수), 손미정(여고생) 세 사람이 22m 높이의 성화대에 올라 불을 붙였다.

▲ 서울올림픽 마스코트와 심벌

그것은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분단과 전쟁, 가난과 독재가 전부인 것처럼 알려졌던 이 나라에서 세계 160개국 1만3,000여명 선수단이 참여하는 제전(祭典)이 열릴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건국 40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낸 작은 나라 대한민국이 두 번의 반쪽 대회를 극복하고 동·서 화합의 큰 무대인 스물네 번째 올림픽을 마련했던 것이다.
 
5공 때 올림픽조직위원장이었던 노태우는 서울 개최를 반대하려는 미국의 움직임에 IOC 위원들이 쑥덕거리자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한다. "만약 개최지를 변경하면 잠실주경기장 한가운데에 사마란치 위원장과 위원 81명의 무덤을 만들고 비석에 '세계 평화를 망친 자들이 여기 묻혀 있노라'고 새기겠다."
 
▲ 올림픽공원 평화의 문

서울올림픽은 33개의 세계 신기록과 227개의 올림픽 신기록을 냈으며, 한국은 금메달 12개로 세계 4위의 성적을 거뒀다. "독일인 같은 정확성과 미국인 같은 기업가정신, 일본인 같은 친절로써 치른 행사"라며 세계는 한국을 극찬했다. 서울과 인천의 소매치기들이 모여 "외국인을 털지 말자"며 휴업을 결의했을 정도로 온 국민은 똘똘 뭉쳤다. "한국의 가을 하늘을 사 가고 싶다"는 말이 나올 만큼 날씨도 쾌청했다.

   

서울올림픽은 2,520억원(순이익은 179억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한국의 이미지 제고가 가져온 효과는 훨씬 더 막대했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란 구호처럼 다음해부터 한국인의 해외 여행이 자유로워졌으며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란 노래 가사처럼 세계의 냉전체제는 와해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4/2008080401648.html

[47] 북방외교
소련․중국과 수교. 공산권과 본격적인 교류 시작

▲ 1990년 6월 4일  노태우ㆍ고르바초프의 샌프란시스코 회담.

청와대 전속 사진사가 찍은 이 사진은 한.소 첫 정상회담을 기록한 유일한 영상 자료다.

 

1990년 6월 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 페어먼트 호텔에서 노태우와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의 첫 한.소(韓蘇)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 정상회담 이후 한.소 관계는 급물살을 탔고, 예정보다 3개월 앞당긴 9월 30일에 소련과 수교했다.

 

세계 냉전체제의 해체 직전인 1980년대 말, 대한민국은 대단히 계획적이고 주도적인 외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적성(敵性) 국가'로 분류됐던 공산권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것이며, 그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었다.

 
노태우 정부는 1988년의 '7·7 선언'으로 북한·소련·중국에 대한 개방 의지를 밝혔고, 이로부터 '중공(中共)'이란 용어가 '중국(中國)'으로 바뀌었다. 88 올림픽에서 대한민국의 성공상(像)을 본 동구권은 무척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1989년 2월 헝가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대(對) 공산권 수교의 봇물이 터졌다.

 

1992년 8월 24일에 한·중 수교가 이뤄짐으로써, 1949년부터 43년 동안 중국 대륙과의 교류가 단절됐던 한국사의 매우 이례적인 기간이 끝났다.
노태우 정부 기간 동안 새로 수교한 나라는 45개국이었으며, 그 인구는 17억 명이 넘었다. 이와 같은 화해 분위기 속에서 남북한은 1991년 9월 18일 유엔에 동시 가입했고, 1992년 2월 19일에는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非核化) 공동선언을 발효시켰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6/2008080600031.html

 

[48] 지방자치 개막
시의원.도지사도 주민이 뽑다

▲ 5·16 이후 사라졌던 기초·광역 지방의회가 1991년 주민 직선으로 부활됐다.

 이 해 7월 8일 열린 서울시의회 개회식에서 의원들이 선서를 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건국 이후 지방자치제는 3권분립과 더불어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고, 제2공화국 때인 1960년 12월에는 시장. 도지사 선거까지 치러졌지만, 박정희 정부는 중앙집권적 근대화를 위해 지방자치를 전면 중단했다. 1988년 3월의 지방자치법 개정에 이어 드디어 1991년 3월 26일 주민 직선에 의한 기초의회 선거가 실시됐다.
광역. 기초 자치단체장의 선거가 시작된 것은 4년 뒤인 1995년 6월 27일의 일이었다. 
 
지방자치제는 한국 사회에 수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반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사이의 갈등과 소통 부족, 님비(NIMBY-Not In My Back Yard)라 불리는 지역이기주의 등 숱한 문제점들도 드러났다. 정부청사보다도 넓은 청사를 짓는 허세와 재정 자립도가 낮은 궁핍도 여전히 공존하고 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6/2008080601676.html

 

[49] 서태지와 신세대 등장
랩과 댄스로 문화 대통령에...

▲ 1993년 7월 15일 서태지(가운데)가 그룹 멤버인 이주노(왼쪽). 양현석과 함께

인터뷰를 위해 조선일보사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 / 조선일보 DB
 

노태우 정부 말기인 1992년 4월 11일, 록밴드 시나위의 베이스 주자였고 고교를 중퇴했으며 정현철이라는 본명을 지닌 20세의 청년이 TV에 신인 댄스 그룹의 리더로서 출연했다. 그때만 해도, 그가 새로운 세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떠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러나 그로부터 대한민국의 문화사(文化史)에서 아무도 '서태지'라는 이름 석 자를 빼놓을 수 없게 됐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8/2008080800090.html

[50] YS의 하나회 해체
민간정부의 군 통제권 회복

 
▲ 1993년 2월 25일 국회 앞 광장에서 열린 제14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손을 들어 박수에 답례하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 군 출신 대통령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뒷자리에 앉아 있다. / 조선일보 DB

 

김영삼은 1992년 12월의 대선에서 당선됐고, 193만표 차로 패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1993년 2월 25일 김영삼이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30여년 만에 군(軍) 출신이 아닌 대통령의 정부가 들어섰다. 김영삼은 이를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정부를 문민정부라 불렀다.

   

3월 8일, 김영삼은 군의 핵심 요직을 맡고 있던 육군참모총장 김진영과 기무사령관 서완수를 전격 경질했다. 군 최강의 인맥이자 전두환·노태우 두 대통령을 배출한 군내(軍內) 사조직 '하나회' 척결의 신호탄이었다. 이로부터 벌어진 대대적인 군내 물갈이로 취임 석 달만에 무려 42개의 별이 떨어졌다.

김영삼의 군 개혁은 오랜 세월 동안 절대성역으로 간주됐던 군부가 민간 정부에 의해 확실한 통제를 받게 된 대전환이었다. 기무사(옛 보안사)의 대통령 독대와 대민 정보수집 부서를 폐지하는 등의 제도적 조치도 뒤따라 군인의 정치화가 차단됐다. 이후 군내 새로운 사조직 형성이 불가능해지게 되면서 쿠데타의 가능성도 사라졌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9/2008080900063.html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 (6)
  

 

조선일보가 대한민국 건국(建國) 6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연재한  

[사진으로 본 건국 60년, 60대 사건]의 내용 일부를 인용하여 정리해 보았습니다.

 기사 원문은 각 항목 끝에 [원문보기]로 연결하였습니다.

 

   

 [51] 재산공개.금융실명제
 투명한 사회로 한발 내딛어 
   

 ▲ 1993년 8월 12일 금융실명제 실시가 전격 발표되자,

그동안 금융실명제를 주장해 왔던 경실련이 축하 모임을 열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93년 2월 27일, 취임 3일째인 대통령 김영삼은 자신과 가족들의 재산을 전격 공개했다.
17억7,822만원. 이것은 김영삼이 "역사를 바꾸는 명예혁명"이라며 단행한 고위 공직자 재산공개의 시작이었다.

 

재산공개 파문으로 국회의장 박준규가 민자당을 탈당했고, 유학성·김문기 등은 의원직을 사퇴했다. 전 국회의장 김재순은 3월 29일 정계은퇴 성명을 발표하며 토사구팽(兎死狗烹 : 토끼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잡아먹힌다)이란 고사성어로 심경을 표현했다. 자신을 한신(韓信)에, 김영삼을 한고조 유방(劉邦)에 비유한 셈이었다. 5월 20일에는 공직자윤리법 개정안이 통과돼 공무원의 재산 공개를 제도화했다.

 

6월 22일, 김영삼은 부총리 이경식을 불러 금융실명제를 빨리 진행할 것을 지시했다. "이야기가 새면 모가지다. 비밀을 지켜라."

실무진이 7월 하순 미국 출장을 떠난 뒤 경유지인 도쿄에 내려 몰래 귀국했고, 과천의 밀폐된 아파트에서 '남북통일 작전'이란 암호명의 작업을 수행했다.

  
8월 12일 저녁 7시45분, 금융실명제 실시가 헌법 제76조의 대통령 긴급명령권에 의해 전격 발표됐다. 이로부터 모든 개인과 법인은 금융기관과의 거래 때 실명이 아니면 거래를 할 수 없게 됐다. 부정축재 자금과 부동산 투기자금의 세탁절차였던 가·차명 예금이 사라졌고, 세원이 투명해져 이자 소득세가 낮춰졌다. 부작용도 있었지만, 재산공개와 금융실명제는 장기적으로 한국 사회를 투명하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10/2008081001131.html 

 

  [52] 성수대교.삼풍백화점 붕괴
 끊어진 다리… 무너진 백화점… 대한민국 자존심도 내려앉았다.

 

    ▲ 1995년 6월 29일 지상 5층 건물이 순식간에 붕괴된 삼풍백화점의 사고 현장. / 조선일보 DB

  

아직도 세상을 보이는 대로 믿고 편안히 잠드는가

그래도 지금이 지난 시절보단 나아졌다고 믿는가

무너진 백화점, 끊겨진 다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 넥스트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 1995 -

  

가랑비가 내리던 1994년 10월 21일 아침 7시 40분. 서울 성수대교의 중간 지점, 48m의 현수 트러스 부분이 갑자기 꺼지면서 한강으로 내려앉았다. 이 사고로 무학여중·고생 9명 등 모두 3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8개월 후인 1995년 6월 29일 오후 5시 55분. 서울 서초동에 있던 지상 5층 지하 4층, 연면적 7만4,000평방미터 규모의 삼풍백화점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6년 전에 지은 단일 백화점 매장 중 전국 2위였던 이 대형 건물의 붕괴로 사망자 502명, 부상자 937명이 발생했다. 무단 설계 변경과 부실시공, 행정감독 소홀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총체적 부실이었다.

세 명의 젊은이가 매몰 11~17일 만에 구조되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두 사건과 1993년 3월의 구포 무궁화열차 전복(78명 사망), 7월의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66명 사망), 10월의 서해 훼리호 침몰(292명 사망), 1995년 4월의 대구 지하철 폭발(101명 사망) 등 잇단 대형 참사는 김영삼 정부의 지지율을 하락시켰다. 그것은 참사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앞만 보고 질주해 온 대한민국의 압축 성장에 대한 경고음이었고, 고속 성장의 이면에 졸속 성장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일깨웠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12/2008081200073.html

 

[53] 全․盧 구속수감 
 12.12,  5.18  전격 재수사.  처벌받은 '성공한 쿠데타'

▲ 1996년 9월 전두환(오른쪽), 노태우(가운데) 전 대통령이

12·12 및 5·18 사건 관련 재판정에 함께 서 있다. / 조선일보 DB

   

김영삼 정부는 전(前) 정권들을 군사정권으로 여기기는 했지만 단죄할 의사까지는 없었다. 1994년 10월 29일, 검찰은 12·12 고소·고발 사건에 대해 "군 형법상 군사반란 사건"이라며 전두환·노태우 등의 반란죄를 인정했으나, 국가적 혼란이 우려된다며 기소유예 했다.
7월 19일, 검찰은 5·18 관련 피고소인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을 내렸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였다.

그런데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의원 박계동에 의해 노태우 비자금이 폭로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27일, 노태우는 대국민 사과문에서 "재임 중 5,000억 원의 통치자금을 조성했고 퇴임 때 1,700억 원이 남았다"고 실토했다. 김영삼은 '성역 없는 수사'의 지시를 내렸고 노태우는 11월 16일 구속됐다.

 

11월 24일, 김영삼은 그 사건들을 다시 수사할 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12월 3일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도주(검찰의 판단)한 전두환은 다음날 현지에서 체포, 구속돼 안양교도소로 압송됐다.
  
전직 대통령 두 명이 동시에 수감된 초유의 상황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됐다.
일본 아사히신문은 "대통령의 범죄를 재판함으로써 한국 민주주의의 역량을 내외에 과시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1996년 8월 5일 서울지검은 전두환에게 사형, 노태우에게 무기징역을 구형했고,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원(전두환), 징역 17년과 추징금 2,628억원(노태우)을 확정했다. 두 사람이 사면·석방된 것은 김영삼 정부가 끝나기 직전인 그해 12월 22일의 일이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13/2008081300076.html
 

[54] OECD 가입
 선진국 문턱 진입, 흥분과 기쁨도 잠시

 

▲ 1996년 10월 25일 프랑스 파리에서 공노명 외무장관과 도널드 존스턴 OECD 사무총장이

한국의 OECD 가입 협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 로이터 자료사진

1995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드디어 1만 달러를 돌파했다. 그것은 1945년 광복 당시보다 무려 220배 이상 늘어난 지표였으며, 압축적 경제성장의 상징과도 같았다. 그러나 1990년부터 6년 동안 경상수지 누적 적자가 487억 달러에 이르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1만 달러 기록 달성에 집착했고, 원화 가치는 비정상적으로 높게 유지되고 있었다.

  

1996년 10월 11일 대한민국의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가입이 확정됐다. OECD의 29번째 회원국이 된 것은 선진국의 문턱에 들어선 것을 의미했으며, 지난 50년에 걸쳐 이뤄진 대한민국 근대화의 결실이자 이정표였다. 그러나 선진국의 환상에 도취되던 그 순간에 이미 중병(重病)의 증세가 나타났다. 국내 시장 개방으로 외국 자본이 밀려들었고 외채가 쌓여 갔으며, 고비용·저효율의 경제 구조로 인해 기업 채산성이 악화되고 한국 제품의 국제 경쟁력이 저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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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15/2008081500070.html 

  

[55] IMF 사태 
 대량 不渡·失業…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이겨내

▲ 1998년 1월 9일 범국민적인 금 모으기 운동의 산물인 "애국 금(金)" 1차분이

울산시 고려아연 온산제련소에 도착했다. / 조선일보 DB

  

1997년 11월 10일 오후 3시쯤, 대통령 김영삼은 전 부총리 홍재형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각하, 아무래도 IMF(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잘못하면 국가 부도가 날 수 있습니다!" 그 때까지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김영삼은 경악했다.


그 해 초부터 한보·삼미·진로·대농 같은 대기업이 줄줄이 도산했다. 7월 15일 재계 순위 8위인 기아가 부도 처리됐다.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급격히 고갈됐다. 그런데도 한국인이 그 해 7~8월에 쓴 해외여행 경비는 15억3,000만 달러였다.

  

11월 14일 정부는 IMF로부터 구제금융 지원을 받기로 사실상 결정했다. 21일, 신임 부총리 임창렬은 "IMF에 200억 달러의 지원을 요청키로 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경제 식민지로 전락한 국치일(國恥日)" "나라가 '학실히' 거덜났다"는 탄식이 이어졌다.

 IMF는 강도 높은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원화와 주식이 폭락했으며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대량 도산과 실업이 줄을 이었다.

1998년 한국 경제는 실업률 7.0%와 경제성장률 -6.7%라는 최악의 경제 위기에 빠졌다. 커다란 고통이 국민들을 짓눌렀다. 그 해 실업자 수는 200만명에 가까웠고 6,000명이 넘는 노숙자가 거리로 나왔으며 기업의 신규 채용은 거의 중단됐다.
 
그런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희망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 1998년 1월 시작된 범국민적인 금 모으기 운동에는 한 달만에 243만명이 참여해 20억달러에 가까운 16만4,000여kg의 금이 쌓였다.  2001년 8월 IMF 차입을 전액 상환할 수 있었던 데는 이처럼 위기를 극복하려는 수많은 국민들의 의지가 큰 힘이 됐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18/2008081800051.html

 

[56] 정보화시대 개막
 "정보화는 앞서가자" 인터넷 인구 3,500만명

 
▲ 1999년 1월, 9년째 가족신문을 만들어 오던 경기도 의왕시 반극동씨 가족이

새로 시작한 인터넷 가족 뉴스서비스를 함께 만들고 있다. / 조선일보 DB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 1995년 3월 5일 조선일보가 내걸었던 이 구호는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현실화됐다. 1995년 말 36만명이던 한국의 인터넷 이용 인구는 1997년 100만명을 넘어섰으며, 1999년 말에는 1,000만명을 돌파했다. 2008년 상반기까지 전체 인터넷 인구 3,500만 명 가운데 초고속 인터넷 가입자는 무려 1,506만명이었다.

  

휴대전화 역시 비약적인 성장을 보였다. 삼성전자가 판매한 휴대전화는 1996년 100만대에서 2008년 상반기에만 9,200만대로 급증했다. 2008년 6월 현재 이동통신 가입자는 4,498만명으로, 대다수의 국민이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놀라운 현실을 이뤘다.

 

하지만 정보화의 급성장으로 인한 양(量)과 질(質)의 불균형은 숱한 사회적 부작용을 낳았다. 인터넷의 익명성의 뒤에 숨은 언어폭력과 선동, 문자메시지와 게임 중독, 자폐적 인간의 등장 같은 정보화의 그림자도 계속 생겨났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18/2008081801741.html

 

[57] 첫 남북정상회담
 분단 55년 만에 남북정상 손 잡았지만…

▲ 2000년 6월 13일 평양에 도착한 김대중 대통령이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안내로 백화원 영빈관에 들어서고 있다. / 조선일보 DB

  

1998년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대중은 그 해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대한민국 건국(建國) 50년사(史)는 우리에게 영광과 오욕이 함께 했던 파란의 시기였다"며 "제2의 건국을 향한 첫 걸음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총체적 개혁을 내건 제2건국 운동은 2003년까지 계속됐지만 국민 중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김대중 정부는 대북 관계에서 햇볕정책으로 일관했다.

  
1998년 6월 16일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주영이 소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판문점을 넘었고, 11월 18일에는 금강산 관광이 시작됐다. 2000년, 한국 정부는 비밀리에 4억5,000만 달러를 대북 송금한 뒤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6월 13일, 대통령 김대중이 탄 비행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도착했다. 김대중은 마중 나온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과 악수를 나눴다. 남북 정상이 처음으로 손을 맞잡은 순간이었다. 이때 평양의 군중은 "결사옹위(決死擁衛) 김정일"을 크게 외쳤다. 
  
이후 남북교류는 크게 확대됐다. 이산가족의 상봉이 이뤄졌고 개성공단이 만들어졌다. 퍼주기 식 남북교류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였지만, 북한의 개혁·개방은 이뤄지지 않았다.
김정일은 군부가 정치·경제를 통제하는 선군(先軍) 정치를 계속 펼쳤고 2006년 10월에는 핵실험을 강행해 동북아의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19/2008081901645.html

 

[58] 월드컵과 서해 해전(海戰) 
 "대~한민국"  황홀했던 월드컵 4강
24명 死傷 서해해전 분단의 현실 일깨워

▲ 2002년 6월 18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한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에서
안정환이 역전 골든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 조선일보 DB
 

▲ 경기도 평택 2함대사령부 기지내 야외 공간에 전시돼 있는 참수리 357정. / 조선일보 DB

 

한·일 월드컵이 열린 2002년 6월. 한달 동안 대한민국은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네덜란드 출신의 감독 거스 히딩크가 이끈 한국팀은 4일 폴란드전 승리를 시작으로 4강 진출이라는 믿을 수 없는 '신화'를 창조해 냈다.

그 열기는 '붉은 악마' 수백만 명을 거리로 뛰쳐나오게 했다.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민국"을 외친 그들은 놀라운 에너지를 발산해 냈다. 2002년 6월을 계기로 한국은 '붉은색'과 '엄숙하기만 한 태극기'의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유롭고 열광적이면서도 질서정연한 축제" "생동하는 대한민국의 힘을 젊은이들이 분출시켰다"는 찬사가 잇따랐다. 
  
돌연한 비보(悲報)가 날아든 것은 결승전 전날인 6월 29일이었다. 오전 10시25분 서해 연평도 인근 해상에서 북방한계선(NLL)을 넘은 북한 경비정 2척이 아군에게 선제 기습포격을 가했다. 참수리 357호의 조타실이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고, 소령 윤영하, 중사 한상국·조천형·황도현·서후원, 병장 박동혁 등 6명이 전사했으며 18명이 부상당했다. 확전을 우려한 군 수뇌부는 전투기를 투입하지 않았다.  1999년 6월 제1연평해전이 일어난 지 3년만의 일이었다.

  

다음날인 30일, 대통령 김대중은 월드컵 결승전 참관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 7월 1일의 합동영결식에 대통령, 국무총리, 국방부장관, 합참의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신문들은 '전두환 전 대통령, 손학규 경기지사…'의 순으로 참석자 명단을 보도했다.

서해해전의 추모 행사는 2008년 3월에야 비로소 정부 주관으로 격상됐고, 4월에는 '제2연평해전'으로 공식 명칭이 바뀌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21/2008082100094.html
  

[59] 대통령 탄핵
무리한 국정운
영의 상징. 63일간 대통령은 없었다

▲ 2004년 5월 14일 서울 지하철 3호선을 탄 시민들이 노무현 대통령이

헌법재판소 의 탄핵 기각 결정에 따라 직무에 복귀했다는 뉴스 속보를 보고 있다. / 조선일보 DB
  

2004년 3월 12일 국회가 대통령을 탄핵하는 건국이래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국회의장 박관용은, 나중에 이렇게 회고했다. 10일 오전 청와대에 전화를 걸어 야3당 대표들과 대통령의 만남을 제의했지만, 오후에 전화가 와 "대통령은 너무 지쳐있어서 만날 필요가 없답니다."고 했다. 박관용은 "아! 이 사람들이 파국을 원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2003년 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노무현은 2004년의 17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물론 한때 한솥밥을 먹었던 민주당까지도 분노하게 했다. 대통령 탄핵소추는 헌법 제65조에 규정된 의회의 견제권이었지만 많은 국민들은 납득하지 않았다.

4월 15일의 총선에서 여당은 152석의 과반 의석을 얻었고, 63일간 권한이 정지됐던 노무현은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기각함으로써 복귀했다.

  
적법한 탄핵소추 과정이 의회의 쿠데타로 공격받은 이 사건은 한국 정당정치와 대의제(代議制)가 대단히 취약한 동시에 무시되고 있다는 현실을 그대로 보여 줬다.

또한 5년 동안 줄곧 이어진 무리한 국정 운영의 상징이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2003년 말 20%대 초반으로 급락했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22/2008082201656.html

 

[60-끝] 쇠고기 파동과 두 개의 8.15
지난 60년, 위기의 순간은 커다란 기회였다

▲ 2008년 6월 21일 밤 서울 광화문 세종로 사거리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에 참가한 시위대 일부가

모래주머니를 쌓고 전경버스 지붕에 올라가 각종 깃발을 흔들고 있다. / 조선일보 DB 

 

2008년 봄에 일어난 '촛불'의 물결은, 분명 자신들에 의해 압도적인 표차(票差)로 들어선 바로 그 정권이 민심과의 소통을 거부한 채 독주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저항이었다.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을 결집시킨 디지털 포퓰리즘의 역동성은 놀라웠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보면, 일부에 의해 집단지성으로까지 추켜세워졌던 그 촛불의 논리적 토대는 모래성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국산 쇠고기 반대 시위를 촉발시켰던 4월 29일 MBC PD수첩의 방송내용 중 주저앉는 소가 광우병 소, 한국인의 유전자가 광우병에 취약하다는 등의 핵심 내용들은 모두 허위인 것으로 판명됐다. 방송 사흘 뒤의 첫 촛불문화제에 갑자기 1만명의 인원이 모인 것을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사회를 온통 뒤흔들어놓은 거대한 사기극(詐欺劇)의 구도나 다름없었다.

  
더 큰 문제는 촛불이 의회와 정당정치라는 대의(代議)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무시했다는 데 있었다. 대로를 점거한 시위대 중 일부는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노래를 부르며 마치 자신들이 주권을 독점한 듯 의기양양했다. "비폭력할 거면 집에나 가"라고 외치는 상습 시위꾼들에 의해 촛불이 변질되고, 경찰이 옷이 벗겨진 채 폭행을 당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948년 정부수립 당시 자본도 자원도 기술도 없이 오직 맨주먹뿐이었던 세계 최빈국 대한민국은 2008년 8월 15일 건국(建國) 60년을 맞았다. 산업화와 민주화, 정보화를 모두 이뤄낸 기반 위에 새로운 내일을 설계해야 할 그 시각, 정치권은 8.15 경축식에서조차 둘로 갈라졌다. 물가를 비롯한 경제지표들은 최악의 상황으로 빠졌다. 그러나 지난 60년의 역사가 최소한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것은, 가장 위태로워 보였던 순간이야말로 돌이켜보면 또한 커다란 기회(機會)이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26/2008082600039.html

 

 

▲ 1945년 8월 15일, 식민시대로부터 해방되다.

그리고 3년 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크고 작은 격동의 세월이 흘러 대한민국이 2008년을 살고 있다.

그 격동 현대사의 이면을 영상으로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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