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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연탄...

뛰노라면 2010. 7. 3. 15:44

추억의 연탄

 

 

형택이가 죽었다. 아침부터 뭔가 낌새가 이상했었다.

누가 정해놓기라도 한 것처럼, 항상 가장 먼저 등교하는 형택이가

조회시간이 다 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형택이가 지각을 한다는 건 아침에 해가 뜨지 않았거나

선생님이 숙제검사를 잊어버린 것만큼이나 낯선 일이었다.

형택이는 아이의 짝이었다.

동네는 서로 반대방향이었지만 반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형택이와 같은 동네에 사는 아이들에게 물어봤지만 모두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이상한 일은 또 있었다.

조회시간 종이 울려도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았다.

반장이 교무실에 가봤지만 "가서 기다려라."는 말만 듣고 그냥 돌아왔다.

한참 뒤에야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왔다.

납으로 만든 가면이라도 뒤집어 쓴 듯 침통한 얼굴이었다.

선생님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형택이는 이제 학교에 나오지 못한다."

아이는 선생님이 더 이상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형택이는 죽었다.

1교시 수업이 끝났을 때에는 소문이 화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택이네 가족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었다.

원흉은 역시 연탄가스였다.

작년 종구네 식구들이 죽은 뒤로 두 번째 참변이었다.

아이는 학교 뒤 으슥한 빈 공간, 형택이와 둘이서 자주 놀던 곳을 찾아가 펑펑 울었다.

2교시 종소리가 아이의 가슴에서 땡땡 울렸다.

 

 

아이는 슬프고도 무서웠다.

자신도 언젠가는 형택이처럼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꼬박꼬박 동치미국물을 머리맡에 떠다놓았다.

"자다가 속이 메슥거리거나 어지러우면 문부터 열고 이걸 마셔라"

동치미국물을 떠다놓을 때마다 손자들에게 당부하고는 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미심쩍었다.

일가족을 하룻밤 사이에 죽일 만큼 무서운 연탄가스가

그깟 동치미국물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지 않았다.

 

 

나무를 때던 시절, 곳곳에서 매캐한 연기가 새어 올라오고는 하던 방이었다.

그러니 연탄을 때는 지금 형태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다는 연탄가스는

얼마나 많이 새어들어 올까.

그리 생각해서인지 아침에 일어날 때면 머리가 무거웠다.

나무 때던 시절이 그리웠다.

지게 지고 나무를 하러갈 때마다 그렇게 지겨웠는데….

 

 

 

1960년대를 정점으로 연탄의 급격한 보급확대는 일종의 생활혁명이었다.

베어내고 긁어내어 늙은 짐승의 등처럼 헐벗은 산들은

갈수록 땔감을 공급하는데 인색해졌다.

나라에서는 홍수방지 같은 명분을 내세워 나무 채취를 엄격하게 금했다.

그 상황에서 유일한 대안이 연탄이었다.

연탄은 하루 종일 방을 따뜻하게 해줬고 언제나 밥과 국을 끓일 수 있는 매력적인 연료였다.

도시는 물론, 농어촌에서도 앞다퉈 연탄화덕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무연탄은 화력도 좋고 값도 비교적 싼 편이었다.

그래도 서민들에게 연탄 값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가난한 집과 부잣집을 나누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부잣집들은 온 겨울을 날 수 있을 만큼 창고에 쌓아놓고 땔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돈이 생기는 대로 한 두 장씩 사다 쓸 수밖에 없었다.

 

 

 

도시의 저녁 무렵 새끼줄에 연탄 한 두 장을 꿰어들고 골목길을 올라가는

가장의 등 굽은 뒷모습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 당시 서민들의 꿈은,

독에 쌀을 가득 채우고 광에 연탄을 높다랗게 쌓아보는 것이었다.

연탄은 생활을 편리하게 해줬지만 불편한 점도 많았다.

제대로만 갈아주면 몇 년이라도 꺼질 리 없는 게 연탄이었지만,

새벽에 깜박 시간을 놓치면 그대로꺼져버렸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집에서는 갈아줄 연탄이 없어서 가장이 사들고 올 때까지

눈물을 머금고 꺼트리기도 했다.

한번 달궈지면 밤새 따뜻하던 구들장과 달리 얇디얇은 시멘트 방바닥은 금세 식어버렸다.

 

새벽녘 연탄불이 꺼진 뒤, 아이들은 바들바들 떨고 가게문은 안 열리고,

주부들의 가슴은 연탄처럼 새까맣게 타 들어갔다.

그러다 날이 밝으면 부리나케 달려가서 번개탄(착화탄)을 사다가 불을 붙였다.

번개탄이 나오기 전에는 숯불을 피워 살리거나 옆집으로 밑불을 얻으러 다녀야 했다.

 

 

 

추울 때는 무턱대고 불문(공기구멍)을 열어놓았다가 비닐장판을 새까맣게 태우고,

연탄은 후르르 타버려 불이 꺼지는 경우도 빈번했다.

연탄을 갈 때 가장 곤혹스러운 건 불붙은 연탄이 서로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때였다.

타버린 맨 아래 연탄을 떼어내야 위의 연탄을 아래에 넣고 새 연탄을 올리게 되는데

이게 서로 붙어버리면 난감했다.

성급하게 두드리다가 위 연탄까지 깨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때는 녹슨 식칼로 떼어내기도 하고 삽 같은 도구를 동원하기도 했다.

연탄구멍을 맞추는 일도 나름 노하우가 필요한 작업이었다.

 

아래와 위 연탄의 구멍을 잘 맞춰야 쉽게 불이 옮겨 붙는 것은 물론

연탄이 골고루 타고 가스도 적게 발생한다.

하지만 이 작업이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라서

초보자들은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낑낑거려야 했다.

 

 

 

그렇게 한참 들여다보다 보면 가스를 들이마시게 되어 울렁울렁 어지럼증에 시달리고는 했다.

아궁이에 밀어 넣고 당기던 연탄화덕이 보일러로 진화한 뒤에는 많이 편해졌지만

물통을 연결하는 고무호스가 녹아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렇건 말건 아이들은 즐거웠다.

연탄불에 별별 걸 다해먹었다.

라면을 끓이고 가래떡이나 쥐포를 구워먹는 건 기본이었다. 국

자에 '달고나'를 해먹을 때도 연탄불이 요긴하게 쓰였다.

까맣게 탄 국자를 뒤늦게 감춰보지만

저녁에 들어온 어머니에게 들켜 경을 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국내에서 연탄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대한제국 시절 일본인에 의해서라고 한다.

 

 

 

1960년대는 연탄산업의 전성기였다. 63년 말 국내의 연탄공장은 400여 개에 달했다.

하지만 영원히 서민들의 곁을 지킬 것 같았던 연탄도 세월의 창날을 비껴 가지는 못했다.

기름보일러가 보급되고 도시가스 같은 청정연료를 쓰게되면서 석탄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90년대 초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이 시행되면서 석탄산업은 본격적인 정리단계에 접어들었다.

탄광은 대부분 폐쇄되고 한 때 시커먼 모습으로 도시에 자리잡고 있던 연탄공장들도

변두리로 밀려나거나 문을 닫았다.

 

 

달동네에 공급되거나 비닐온실 난방용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긴 했지만

연탄의 시대가 막을 내렸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근 이상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연탄소비가 다시 늘고 있다는 것이다.

 기름보일러를 연탄보일러로 다시 바꾸는 집도 늘고 있다.

연탄 값도 꽤 올랐다고 한다.

때마침 불어온 복고바람 덕인지 거리에서 연탄구이집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그러고 보면 연탄의 시대는 막을 내렸을지 몰라도 연탄으로 상징되던 고난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찬바람이 기웃거리는 어느 골목길에는 내 가난한 어머니와 내 아픈 형제들이

터져나오는 기침을 깨물며 하얗게 바랜 서러움을 연탄재처럼 쌓아가고 있을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