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의 의미와 유래, 그리고 한글 축문
* 국어사전
[설ː] <명사> ① 새해의 첫머리. <동의어> 세수(歲首).
② 정월의 초승. <동의어> 세시①. 세초(歲初). 연두(年頭). 연수(年首).
연시(年始). 연초(年初). 정초(正初). <참고> 세밑
* 백과사전
한문 문체의 일종. 설체(說體)는 해석과 서술을 주로 하는 문체이다.
설이라는 말은 《주역(周易)》 <설괘(說卦)>에서 시작되었다.
한(漢)나라 때 허신(許愼)의 《설문해자(說文解字)》도 여기서 기인했으나
문체로는 형성되지 않다가,
당(唐)나라 때 고문운동(古文運動)에 힘입어 새롭게 창안되었다.
한유(韓愈)의 <잡설(雜說)>, 유종원(柳宗元)의 <포사자설(捕蛇者說)>
<승부설> 등이 있는데, 대부분 우의적(寓意的)인 작품이다.
송(宋)나라 때 소순(蘇洵)은 <명이자설(名二字說)> 등을 통해, 이와는
성격이 다른 고명사의(顧名思義)를 강조한 간결한 설체인 <명설(名說)>
<자설(字說)>을 창안하였다. 한국 문헌에 처음 보인 것은 한유와
유종원의 영향을 받은 고려시대 이규보(李奎報)의 문집에서이다.
문집에는 <경설(鏡說)> <주뢰설(舟賂說)> 등 다수의 설체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우의적 작품이다. 조선시대에는 강희맹(姜希孟)의 <훈자오설(訓子五說)>,
권호문(權好文)의 <축묘설(畜描說)>,
김매순(金邁淳)의 <작치설>, 이건창(李建昌)의 <응설(鷹說)> 등이 있다.
소순의 영향을 받은 명설·호설(號說)·자설도 유행하였는데, 자설이 대부분이다.
자설은 고려시대 이곡(李穀)의 <경보설> <심보설>,
호설은 백문보(白文寶)의 <율정설(栗亭說)> <척약재설>,
명설은 조선 초 하륜(河崙)의 <명자설(名子說)> 등이 있다.
* 설의 유래
설은 새해의 첫 시작이다. 설은 묵은 해를 정리하여 떨쳐버리고 새로운
계획과 다짐으로 새 출발을 하는 첫날이다. 이 '설'은 순수 우리말로써
그 말의 뜻에 대한 해석은 구구절절 하다.그 중 하나가 '서럽다'는 `설'이다.
선조 때 학자 이수광이 `여지승람'이란 문헌에 설날이 '달도일'로 표기되었는데,
'달'은 슬프고 애달파 한다는 뜻이요, '도'는 칼로 마음을 자르듯이 마음이
아프고 근심에 차 있다는 뜻이다. `서러워서 설 추워서 추석'이라는
속담도 있듯이 추위와 가난 속에서 맞는 명절이라서 서러운지,
차례를 지내면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그렇게 서러웠는지는 모르겠다.
다음은 '사리다'[愼, 삼가다.]의 `살'에서 비롯했다 설(說)이다.
각종 세시기들이 설을 신일(愼日)이라 하여 '삼가고 조심하는 날'로 기술한
것도 몸과 마음을 바짝 죄어 조심하고 가다듬어 새해의 첫 시작을 경거
망동하지 말라는 까닭이다. 옛날 문헌들에 정초에 처음 드는 용(辰)띠 날,
말(牛)띠 날, 쥐(子)띠 날, 돼지(亥)띠 날, 그리고 2월 초하룻날을 신일(愼日)
로 적혀 있음을 근거로 하여 육당 최남선이 풀이한 기원설이다.
새해부터 처음 맞이하는 십이일을 상십이지일(上十二支日)이라 하여 여러
가지를 삼가며 조심할 것을
가르친 풍속이 있는 걸 볼 때, 매우 타당한 설이다.
'설'의 어원에 대해 또 다른 견해는 나이를 댈 때 몇 살... 하는 '살'에서
비롯된 연세설이다. 한국말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친 우랄 알타이어계에서
해가 바뀌는 연세를 '살(산스크리트語) 잘(퉁구스語) 질(몽고語)'이라 한다.
산스크리트 말에서 `살'은 두 가지 뜻이 있는데
그 하나는 해가 돋아나듯 '새로 돋고 새로 솟는다'는 뜻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시간적으로 이전과 이후가 달라진다는 구분이나 경계를
뜻하고 있다. 이 모두 정초와 직접 연관되고 있다.
중국의 어원사전인 `청문엽서'에 보면 연세를 나타내는 `살'·
`잘'은 세(世)· 대(代)· 세(歲)· 수(壽)를 뜻하고,
또 대나무나 풀이나 뼈마디를 뜻하는 절(節)의 어원이라고도 했다.
'몇 살 몇 살' 하는 `살'이 그 연세의 매듭(節)을 짓는 정초를 나타내는
'설'로 전화됐음직하다. 또한 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견해는 '설다.
낯설다' 의 '설'이라는 어근에서 나왔다는 설(說)이다.
처음 가보는 곳, 처음 만나는 사람은 낯선 곳이며 낯선 사람이다.
따라서, 설은 새해라는 정신·문화적 시간의 충격이 강하여서
'설다'의 의미로, 낯 '설은 날'로 생각되었고, '설은 날'이
'설날'로 정착되었다. 곧 묵은 해에서부터 분리되어 새해로 통합되어
가는 전이 과정에 있는 다소 익숙치 못하고 낯설은 단계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설은 동지로부터 시작하는 마무리 시기에서부터 새해를 맞이하는
새 시작의 설날을 정점으로 하여, 그리고 상십이지일(上十二支日)과
정월 대보름의 대단원까지를 한 선상에서 보아야 제대로 볼 수 있다.
* 미국에서 설의 의미
설날을 미국에서는 Chinese New Year. holiday 라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 설날이 명절 이라면 중국의 속국이니 당연히 그런줄 안다.
또 태음력으로 새 해를 정한 설날은 당연히 태음력으로 정하는데
모든 사전은 음력이 만들어진 것은
" BC 14세기경 은(殷)왕조시대에는 365.25일의 태양년과 29.5일의
삭망주기를 확립했다는 증거가 있다." 라고 했으니 중국이 음력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수입해서 쓴다고 한다.
그런데 은 왕조는 바로 우리 한민족이 세운 나라이다.
은허 갑골문도 우리말과 우리 상식이 아니고는 해독이 안 된다.
또 우리의 갈래의 하나인 마야나 잉카 문명에서도 음력을 쓴 증거가
나오니 우리가 음력을 쓴 것은 하느님, 환웅 시대로 올라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음력으로 만든 설날이 우리 사전에서도 중국의 음력을 들여다
만든 날 이라 한다.
* 설에 대한 우리말 해석
위 설에 대한 의미가 지금까지도 국어사전, 백과사전에 그렇게 써 있다는
것이 구역질이 난다 우선 그 말 대로라면 우리가 설 명절을 지내는
의미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대략 6천년 전 신석기 문명이 끝이 나고
청동기 문명이 시작될 무렵 지금 바이칼호 부근에는
햇빛을 숭상하는 북방계 몽골리안 일족이 살았고 그들은 환한 햇빛을
숭상하여 그 부족 이름이 환한 부족, 즉 환족(桓族)이었다.
이 환족의 지도자가 환한님인데 이 환한님이 > 화나님 > 하나님 >
하느님이 되었고 한편 환님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한자로 환인(桓因)이다.
인구가 차츰 늘자 하느님으로부터 천부인 세개, 즉 天地人( ㅇ ㅁ △)과
당시 글자가 없었음으로 입으로 전하는(口傳之書) 하느님 교훈의 말씀,
천부경을 받아가지고 첫조선 개국지로 내려오신
환숫(桓雄)께서는 하느님 교훈의 말씀을 잊거나 변질되지 않게 그의
신하 신지(神誌)를 시켜 인류 최초의 글자인 신지녹도문자를
만들었으나 이는 인간의 글자가 아니라 천제를 지낼 때만 쓰는
神의 글자였다. 따라서 지금 우리 한글의 원조가 되는, 또는
가림토의 모체가 되는 신지신획(神誌神劃)을 만드나
이 역시 인구가 늘고 말이 발달하자 열 집 사는 동네에서도
통하지 않자, 3 세 단군 가륵 때 삼시랑 을보륵은 이 신지신획이라는
참글(眞書)를 참고로 가림토를 만든다.
(庚子二年 時俗尙不一方言相殊雖有象形表意之眞書十家之邑語多不通百里
之國字難相解於是命三郎乙普勒讚正音三十八字是爲加臨土其文曰.檀君世記)
따라서 당시는 글자가 부족했으므로 그 부족한 글자를 보충하기 위한
수단이 바로 그림을 그려썼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金文, 甲骨文이다,
그러나 이것이 오히려 뜻을 이해하는데는 글자 보다
쉬웠으므로 중국인들은 이것을 가져다가 자기네 말에 맞추어 자기네
글자를 만드는데 이 금문 갑골문은
진시황때 소전(小篆), 대전(大篆), 그리고 한나라때 예서(隸書),
해서(楷書)등으로 발달하면서
우리에게는 삼국 초에나 역수입 되는데 지금 쓰는 한자가 정착된 것은
삼국 중엽에나 가서이다.그러나 이 중국인들에 의해 발달한 글자는
다양한 음을 쓰는 우리말과 전혀 맞질 않았음으로
우리는 처용가 등 향가에서 쓰는 이두문(吏讀文)을 개발해 썼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순수한 우리말인 설날을 위 국어사전, 백과사전에서 보듯이
지금까지 한자풀이로 하고 있으니 그럼 우리는 그 한자가 정착되기 전
까지는 설날이 없었단 말인가?이런 얼빠진 선비들이 우리나라를 주도하고
있었으니 그 넓던 중국대륙- 우리 국토가 지금 한반도로 찌그러들 수밖에
없는 것인데 아직도 그 습성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바로 우리 국어사전, 백과사전이다.
* 우리가 새해 첫 날을 '설' 이라 하는것에 대하여 우리말로 알아본다.
하느님께서 내리신 천부인 세개 중에
△ 은 사람천부인이고 이것으로 ㅅ 이 만들어 졌다
'ㅅ'은 우선 서(立)는 뜻의 글자이다. 그래서 사람도 'ㅅ'을 쓴다
립(立)은 한자로 설립 자 이다.
따라서 묵은 해가 가고 새 해가 서는 날이 설날(立日)이다.
그런데 이 우리말을 버리고 아직도 중국 한자에 미처
위 국어사전, 백과사전에서는 뚱딴지 캐먹을 말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가?
오늘은 까치설, 내일은 설날이니 이 경사스런 날을 맞이하여 조상에게
차례를 올릴 때 축문을 쓰자.차례나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축을 읽어야 한다.
.
*설날 축문을 써서 읽어야 할 이유
대개는 제사 때는 축을 읽고 설이나 한가위에는 축을 생략한다.
그 이유는 축문은 제 맘대로 횡설수설을 할 수 없으니 언제 누가 왜
이 제물을 올려야 하는 것인가를 영께 알려야 하므로 반드시 글로
써야 하는 것이 좋은데, 지금 우리가 유 세차(維 世次) ....하고 쓰는
한자 축문은 중국 주자의 주자가례(朱子家禮)의 것을 우리가 수입해서
쓰다보니 오직 벼슬한 사람만이 사람인줄 알아 자기 아버지가
벼슬을 못했으면 저승에서도 공부하라는 학생부군(學生府君)이라고 쓴다.
또 이런 엉터리 축문이라도 세종 후 한글이 생긴 뒤에도 한자만이
우리 글자인 줄 알고 한자로 쓸 수밖에
없었고 이 한자를 아는 사람이 한 동네에서 글방 훈장님 밖엔 없었다.
그래서 훈장님을 초빙했는데 이 훈장님은 남의 집 제사에 참여하여 축을
써 주고 축을 읽어주면 당시 일년에 추석, 설날, 그리고 제삿날이나
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당시 그 남의집 제삿날이 바로
훈장님 생일이니 그 제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그 훈장님 메모 첩에는 동네사람들 제삿날이 모두 적혀있었다.
그러나 추석이나 설날 같은 명절에는 동네사람 모두가 차례를 올리고
또 훈장 자신도 차례를 올려야 하니 남의집 축 써주고 읽으러 다닐
여유가 없었다.따라서 동네 사람들은 축도 없는 차례를 지내면서
설날이나 추석 등 명절에는 축을 읽지 않아도 된다고
자위했고 이것이 풍속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왕 제사나 차례를 지내려면 반드시 축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다.
즉 축은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누구에게 제사를 지내는가를 말하는 것이므로
축문이 없는 제사는 지내나 마나이다.
요즘 세상에 축을 읽는다고 혼령이 알아 듣느냐고 한다면 불교나
기독교 등 종교행사도 할 필요가 없다.
축이란 조상 영과 후손의 정신 감응을 하게 하는 글이다.
그러니까 축을 읽으며 제사를 지내면 읽는 사람은 물론 여러
제관들의 마음속에서 조상의 영과 감응하기 때문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들의 축은 어떻게 쓰고 읽을 줄 모르니까
중국의 주자가 지어놓은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써 왔다.
물론 세종 전 한글이 없었을 때는 할 수 없이 그랬다 하더라도 세종이
한글을 만든 후에도 한자나 숭상하여 한자로 쓴 축만을 읽어 왔는데 ...
요즘 젊은이들은 이 한자를 모르니 아예 축을 읽지 않고 제사를 내낸다.
이에 우리말 한글 축문을 주자 가례에 가장 가깝게 번역하여 여기에 올리니
올 설날 부터는 많이 활용하여 이런 것부터 우리 근본을 찾자.
축문은 반드시 어떤 정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반드시 언제 누가 왜 제물을 올리는가는 반드시 써야 하고
사투리로 써도 그것은 상관없다.
* 홍길동의 설날 조상 차례 축문
때는 어느덧 단기 4343년 설날이 되었네유.(서기2010년)
이에 효손 길동이는 감히
조상님의 영전에 아뢰는구먼유.
해가 바뀌어 새해 설날이 되니
조상님들의 하늘과 같은 은혜를 잊을 수 없어
간소하나마 정성껏 제물을 준비하여 올리는구먼유.
부디 감응 하시옵구 올해 저희들에게 복좀 많이 내려 주셔유.
(조상 이란 말은 반드시 칸을 바꾸어 위 부분에 쓰실것)
* 만약 지금도 꼭 한자 축문을 쓰고 싶은분은
지금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 역사를 먹으려 하고 있고
고구려 땅은 한강 이북까지이니 결국 다시 한반도까지 먹으려 하고있다.
그런데도 아직도 중국이 우리 상국이라는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매년 돌아오는 명절날, 그리고 제삿날에 꼭
주자가 만든 한자 축문을 고집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다면 그 축문은 다음과 같이 쓰시라!
維世次 中華民國 毛澤東 記元 .....年 歲首 孝子 吉東 敢昭告于
顯考學生府君
顯妣儒人 密陽朴氏
世序遷易 世首復臨 追遠感時 昊天罔極 謹以淸酌庶羞 恭伸奠獻 尙 饗
(출처:설날 상식 - 동아일보 )
○설날 덕담은 어떻게 하나? 세뱃돈은 왜 줄까?
우리 속담에 ‘보리누름까지 세배한다’는 말이 있다. 원래 새해에 끝냈어야 할 세배를
보리가 누렇게 익는 4∼5월까지 한다는 얘기로 겉치레를 이른 말이다.
그만큼 예절을 중시하는 우리 조상은 세배가 필수였다!
특히 세배를 받은 사람은 덕담의 내용과 시제가 중요하다.
덕담은 반드시 과거형으로 “결혼했다지”, “집도 샀다지”, “올해는 취직도 했다지”
등으로 말해야 한다. 말이 씨가 된다고 믿는 고대인들의 습관이었다.
설날에는 ‘청점’이라 하여, 정초 새벽녘에 처음 듣는 말로 점을 치기도 했는데,
덕담도 청점의 일종으로 여긴 것이다.
세뱃돈은 이러한 덕담의 형태가 물질로 바뀐 것이다.
○설날 떡국은 왜 먹을까?
설을 맞아 먹는 떡국은 한 살 더 늙으라고 먹는 게 아니다.
하얗고 뽀얗게 새롭게 태어나라고 먹는 음식이다.
순백의 떡과 국물로 지난 해 묵은 때를 버리라는 것이다.
처음 먹은 시기는 옛 문헌에 남아있지 않지만,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문답’에 보면
3세기 이전 상고시대, 떡이 주식이던 시절부터 전래된 것으로 본다.
멥쌀을 떡메로 친 가래떡은 예전부터 고급스러운 음식이다. 조선시대 세시풍속기
‘동국세시기’ 행사 기록 책 ‘열양세시기’에는 떡국은 설날에 반드시 먹고 손님에게
대접해야 할 음식이라고 전한다.
가래떡을 쓰는 이유도 가래떡처럼 재산을 죽 늘려가라는 뜻이다.
어슷썰기한 떡은 재물을 상징한다. 조상들은 하얀색 떡국으로 경건한 한 해를 권하며,
동시에 재복도 빌었던 것!
특히 떡국에는 꿩고기를 썼다. 고려후기 귀족들 사이에서는 매사냥이 유행했다.
이 때문에 매가 물어온 꿩으로 끓인 만두국, 떡국은 당시의 귀족음식일 수밖에 없었다.
‘꿩 대신 닭’이란 속담은 바로 귀족 아닌 일반인이 꿩고기를 못 넣고 닭을 써서 생긴 말이다.
○왜 까치 설날은 어제일까?
“까치까치 설날은∼”으로 기억되는 ‘설날’이라는 동요는 윤극영 선생이 1927년
작사,작곡 했다. 그런데 왜 까치 설날을 어제라고 했을까?
예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까치를 길조로 여겼고, 반가운 손님이 오면 까치가 운다고 했다.
동요에서 까치의 설날을 어제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 설이 오면 반가운 손님들이 모인다는
의미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설의 어원은?
‘설’이란 이름의 유래는 3가지 정도로 전해져 온다.
먼저, 새해의 첫날이라 아직 익숙하지 않고 낯설다는 의미로 ‘낯설다’의
어근인 설에서 전해졌다는 것이 첫 번째.
처음 시작이라는 뜻의‘선다’라는 말에서 비롯되어 시간이 흐르면서 ‘선날’이 ‘설날’로
연음화 되었다는 설이 두 번째다.
마지막은 ‘삼가다’라는 뜻의 옛말인 ‘섧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즐거운 명절인 설의 의미와 동떨어진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설을 한자어로
신일(愼日)이라 표현했던 것처럼 새해 첫날부터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설날의 유래는?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 설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설날을 명절로 삼기 위해서는 역법이 제정되어야만 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적어도 6세기 이전 중국에서 태양태음력을 받아들인 이후 제정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설과 정월 대보름, 삼짇날, 팔공회, 한식, 단오, 추석, 중구, 동지를 9대 명절로 삼았다.
조선시대에는 설날과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 했다. 이미 이 시대부터 설이 오늘날과
같이 중요한 명절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설에는 위기도 있었다.
1895년 을미개혁이 단행된 이후에는 양력 1월1일을 공식적인 양력설로 지정했다. 일제시기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양력설 쇠기를 적극적으로 권장했지만 우리 민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에도 음력설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도 음력설만 되면 민족대이동이
지속적으로 이뤄졌고, 1985년 정부에서도 어쩔 수 없이 음력설을 ‘민속의 날’로 지정했다.
하지만 ‘민속의 날’은 명칭도 어중간했고 휴무일도 하루에 그쳐 유명무실했다.
결국 1989년 음력설을 설이라 명명하고 3일간을 휴무일로, 양력설에는 하루의
휴무를 주는 것으로 정했다.
1989년 이후에야 우리 민족 고유의 명절인 설이 제자리를 찾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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