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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선생의 유적지 -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뛰노라면 2012. 9. 7. 16:13

 


행복한 삶을 위하여..

 

남양주시 다산유적지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산 75-1

 

다산유적지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있는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적지입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이 마을에서 태어나 조선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결국은 오랜 유배생활 끝에 고향인 이곳에서 숨을 거두었으며,유배생활 동안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많은 저서를 남기고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유적지 내에는 그의 생가인 여유당(與猶堂)과 선생의 묘, 그리고 다산문화관과 다산기념관이 있습니다.

다산문화관에는 많은 저서들에 대한 소개가 되어 있고, 다산기념관에는 수원성 축조 과정에 쓰였던 거중기, 녹로가 전시되어 있으며,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 다산초당의 축소 모형 등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 선생의 역사의 향기가 있는 다산유적지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입구에서부터 조선 후기의 최고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선생의 초상화가 역사의 깊은 곳으로 안내하는것 같은 느낌입니다. 다산의 최대의 저서를 꼽으라면 아마도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참으로 오래전에 기억속에 담아 두었던 다산 정약용선생의 저서를 이제서야 꺼내보는것 같아 역사의식의 부재를 탓하면서
앞으로 좀 더 우리 역사의 자취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조금은 어렵거나 진부한 내용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다산 정약용선생의 3대 저서이며 우리가 학창시절에 꽤나 외웠던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와 삶의 진실된 면을 볼 수 있는것 같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삶의 지표가 되고
정신적인 지주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다산 정약용선생의 역사의 향기에 젖어보는것도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경세유표

경세유표는 관제, 군현제와 전제(田制), 부역, 공시(貢市), 창저(倉儲),군제, 과거제, 해세,상세,마정,선법(船法)등
국가 경영에 관한 일체의 제도 법규에 대하여 적절하고도 준칙(準則)이 될 만한 것을 논정(論定)한 책입니다.

경세유표는 국정에 관한 일체의 제도법규의 개혁에 대한 논의와 함께 다산 정약용이 1808년 (순조 8년) 유배지 강진군에서 짓기 시작하여 1817년 (순조17년)에 집필을 끝냈으며,처음에는 48권으로 지었으나 필사과정에서 44권 15책으로 편집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의 모순이 집약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토지문제와 농업문제에 대해서도 <지관수제>에서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를 자영농의 경영을 기본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에 두면서도 당장에 실시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여 첫단계로 부분적인 개혁론이라 할 수 있는
정전의(井田議)를 제시하였습니다.

즉, 정전제는 토지를 정자(井田)으로 구획하여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면적을 계산하여 사전(私田)과 공전(公田)의 비율을 9:1로 하거나 수확량의 1/9만 세금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임을 설명하고
당시에 정전제를 실시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실현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관수제>에서는 부세제도의 개혁한을 제시하여
농민과 토지에만 국가의 부세가 편중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모든 산업에 과세할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네이버지식백과에서-

 

행복한 삶을 위하여..



 

목민심서 [ 牧民心書 ]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목민관, 즉 수령이 지켜야 할 지침(指針)을 밝히면서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저서. 48권 16책. 필사본입니다

부임(赴任)·율기(律己 : 자기 자신을 다스림)·봉공(奉公)·애민(愛民)·이전(吏典)·호전(戶典)·예전(禮典)·병전(兵典)·형전(刑典)·공전(工典)·진황(賑荒)·해관(解官 : 관원을 면직함)의 12편으로 나누었으며, 각 편은 다시 6조로 나누어 모두 72조로 편제되어 있습니다.

부패의 극에 달한 조선 후기 지방의 사회 상태와 정치의 실제를 민생 문제 및 수령의 본무(本務)와 결부시켜
소상하게 밝히고 있는 명저서 입니다.

이 책은 정약용이 57세 되던 해에 저술한 책으로서,
그가 신유사옥으로 전라도 강진에서 19년간 귀양살이를 하고 있던 중 풀려난 해인 1818년(순조 18)에 완성된 것입니다

이는 저자가 학문적으로 가장 원숙해가던 때에 이루어진 저술로 민생과 관련된 그의 많은 저서 중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의 저작연표(著作年表)에 의하면, 강진 유배 생활 19년간의 거의 전부를 경전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그러다가 나이가 많아지면서 얻은 학문적 이해와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문제에 마지막 정열을 기울였습니다.

목민심서의 중요성과 오늘날까지 시사하고 있는 위대한 이유는 첫째 공직자로서 어떤 행동해야 되는 지침서입니다.
그 당시에 공직자는 중앙에서 인재선발에서 파견된 지역을 다스리고 녹(오늘날의 월급)을 먹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공직자로서의 마음가짐과 공직자에 대한 책임과 올바른 행동을 알게 해주는 책입니다.

정약용 선생님이 살아았던 그 시대는 세도가가 왕 대신 섭정하는 쪽이라 온갖 부정부패와 탐관오리, 관직매수등이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이점에서 분기를 느끼고 목민심서 저술했습니다


둘째 애국심입니다.
목민심서가 애국심이랑 상관없다고 말은 하지만 나라가 사랑하지 않았으면 애초에 목민심서이란 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나라가 잘되기 위해서는 기본이 공직자가 지역을 잘 다스려야 하며 공직자가 바른 사람들이 많을수록 나라가 평안하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세상으로 만들고 바랬기에 목민심서를 저술했습니다.

셋째 신분제약없이 인재등용입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아무리 과거제도이며 실력이 뛰어나도 인재선발에서 좋은 가문이나 집안, 양반가문 출신이 아니면 인재선발에서 제외되었습니다.
그래서 기회균등과 신분차별없이 인재등용을 강조했습니다.

베트남에서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는 호찌민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베트남 공산당 주석에 올랐지만 북한의 권력자 김일성이나 김정일처럼 호의호식하면서 지내지 않았고
오직 국가를 봉사하고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그렇게 한 비결은 다름아닌 목민심서를 두루 익히고 읽었습니다.

특히나 공직자가 비리와 악행이 난무하고 법과 질서를 어지럽게 하여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우리나라의 고위 공직자들은 부정적인 이미지와 공직자의 신뢰를 불신합니다.
개인적인 바램이지만 공직자가 될려면 꼭 목민심서를 읽어서 바른 공직자가 되어야 합니다.

-네이버지식백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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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흠흠신서[欽欽新書]

<흠흠신서(欽欽新書)>는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이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들을 계몽하기 위해 순조 19년인 1819년 완성, 3년 뒤 간행한 형법서입니다.

30권 10책으로 되어있는 이 책은 <경세유표>, <목민심서>와 함께 1표(表) 2서(書)라고 일컬어지는 정약용의 대표적 저서입니다.

내용은 경사요의(經史要義) 3권, 비상전초(批詳雋抄) 5권, 의율차례(擬律差例) 4권, 상형추의(詳刑追議) 15권, 전발무사(剪跋蕪詞) 3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법의학, 사실인정학(事實認定學), 법해석학을 포괄하는 일종의 종합재판학적 저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의 서문은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내고 또 죽이니 인명은 하늘에 매여 있다"는 글로 시작해
"삼가고 또 삼가는 것이 형을 다스리는 근본이다"는 충고로 끝을 맺습니다.

또 서문에는 "사람이 천권을 대신하면서 두려워할 줄 모르고, 자세히 헤아리지 아니한 채 덮어두고, 모른체 하며 살려야 할 사람은 죽이고, 죽여야할 사람은 살리고서도 태연하고도 편안할 뿐 아니라,
비참함과 고통으로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듣고도 구제할 줄 모르니 화근이 깊어진다"는 내용도 담겨져 있습니다.

한편 국회 법사위(법제사법위원회)는 2003년 9월 '흠흠신서(欽欽新書)' 서문을
가로 12m, 세로 3m짜리 대형액자에 넣어 회의실 벽면에 내걸었습니다.

오직 하늘만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또 죽이기도 하니 사람의 생명은 하늘에 매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목민관이 또 그 중간에서 선량한 사람은 편안히 살게 해주고,
죄지은 사람은 잡아다 죽이는 것이니, 이는 하늘의 권한을 드러내 보이는 것일 뿐이다.

- 중략 -

삼가고 또 삼가는 것이 형을 다스리는 근본이다.-네이버지식백과에서


 

다산유적지는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는 곳에 있습니다.다산이 태어나 자란 곳이며 세상을 떠나 이곳에 묻힌 곳이기도 하지요.그래서 남양주시에서는 이곳을 다산유적지로 조성하여 보존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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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최고의 실학자여며 기품있는 선비였던 다산 정약용은 22세에 벼슬길에 올랐습니다.그러나 다산은 1801년 황사영사건에 연루되어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18년간의 귀양살이를 하게 됩니다.이때 다산선생이 지내던 곳이 바로 전남 강진의 다산초당입니다.

이곳에서 다산은 많은 후학들을 가르쳤고 저서도 많이 저술하였습니다.
학창시절에 수없이 외웠던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마과회통등을 이때 저술한 것들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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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정약용선생은 정조임금때 수원성을 축조하면서 대공사를 총괄하였는데 수원성의 정치적 목적과 경제적 목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원은 정조 13년인 1789년,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전하면서 새 위치인 팔달산 아래로 이전되었습니
다.
이어서 1893년에는 명칭을 화성으로 고치고 유수의 직급을 정2품으로 삼음으로써 수원은 조선 제 2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물론, 사도세자의 신령이 이 모든 계획의 전면에 나서게 됩니다
.

신령을 위로하고자 조선 최고의 명당터에 무덤을 옮기는 것이었고, 뒤이어 기존 읍 하나를 전부터 보아온 새로운 터전으로 옮기게 됩니다. 곧 정조의 지휘 아래 막강한 친위부대인 장용영이 설치함으로써, 동시에 상인을 유치하여 각종 경제적 특혜를 주어 경제적으로 번영시킴으로써, 수원은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서울을 빼고는 견줄 상대가 없는 대도시의 요건을 두루 갖추게 됩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도시의 목적은 한마디로 왕권강화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이었지요.

막강한 군사력과 튼튼한 경제력을 구비한 신흥도시를 배후에 둠으로써 구세력들이 진을 치고 있는 서울을 견제하면서 왕의 지위와 권한을 키워 나가고자 한 것이었습니
다.

한양과 조정은 이미 노론(老論)계 세력들이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고, 도성 시전상인들 역시 그들의 편이었기 때문에 정조 임금은 왕권 강화를 위해 신흥도시 수원성을 축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

행복한 삶을 위하여..

18세기 조선사회는 활발한 상업활동에 의해 빠르게 변모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상업발달은 자연히 활발한 물품의 전국적인 유통을 실현시켰고, 전국 방방곡곡의 물품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되게 마련이지요.

조선 후기 모든 물품의 집합처는 역시 서울이었지만, 지방의 중요 물품산지는 삼남지방이었습니
다.
수원은 삼남의 물품이 서울로 이동하는 간선도로의 가장 중요한 길목에 지리적으로 위치하고 있었던 것입니
다.
그런데 구 수원읍 지형의 궁벽함은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 쌓여 있는 조건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원활한 물류의 흐름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새 수원읍의 입지조건은 전통적인 도시 입지관에서 말하는 풍수지리상 명당터도 아니고 방어상 요충지도 아니었지요.
그러나 사방으로 개방된 길들이 시원하게 이어지는 조건을 훌륭하게 충족시키고 있으며, 팔달산 아래 새 읍치는 평탄하게 열리고 광교천에서 흘러들어오는 개천이 역시 북에서 남으로 흐르동편에는 낮으막한 경사지에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쌓이고 폐쇄적인 구조를 갖춘 구 수원읍이 전통적 도시라면, 개방적이고 교통이 편리한 신 수원읍은 근대적인 도시 형태를 띠고 있었던 것입니
다.

수원성을 축조하면서 다산은 수원성의 성문을 네개정도 갖추는 것을 염두에 두고 포루를 비롯한 새로운 방어시설들의 숫자와 각 시설들의 배치 위치를 설정하였습니다.일종의 수원성곽의 설계안을 구상한 것이지요.다만 다산은 자신의 설계안을 실제 팔달산 아래 수원부의 현장에서 구상하지 못하고
어디까지나 머리속에서만 각종 시설의 배치를 구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산은 수원부의 지세를 어느장도는 알고 있었지만 현장에서 성곽의 설계를 한것은 아니었습니다.따라서 다산이 구상한 성곽의 모습은 실제 성곽공사가 진행되면서는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지어졌다고 합니다.이것은 건축 기술자가 아닌 지식인이면서 학자였던 단산의 한계이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그러나 다산은 근대적인 건축가가 나타나지 않았던 조선말기에 건축가가 행 할 역할을 대신 시도한 셈이었습니다.

비록 중세사회의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성공적으로 목적을 달성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음 시대를 열어가는 선구자적인 다산의 역량을 볼 수 있는 부분인것 같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다산 정약용선생은 수원 성곽의 형태를 새롭게 구상하였을 뿐아니라 축성과정에서도 전혀 새로운 차원의 개념들을 시도하였습니다. 우선 작업과정에서 인부들이 일정한 작업량에 따라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여 작업능률을 올릴 것을 생각하였고 나아가 공사에서 인건비의 부담을 줄이고 백성들의 수고를 덜 목적으로 자재를 운반하는 새로운 수레를 고안하고,아울러 거중기라는 돌을 들어올리는 첨단 장비까지 고안해 내었습니다.

특히 이 거중기는 그 독특한 발상과 형태로 해서 지금까지도 수원성의 가장 상징적인 기구가 되었으며 실학자 정약용의 앞서간 과학정신의 구현으로 평가되고 있습니

다산이 특히 심혈을 기울여 축성에 이용할 기구로 고안한 거중기는 과학기술에 대해 무관심해 있던 조선의 지식사회에 하나의 빛나는 혜성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거중기는 도르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는 장치입니. 그 원리는 비교적 간단하여 위에 네 개 아래에 네 개의 도르레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레 밑으로 물체를 달아매고 위 도르레의 양쪽으로 잡아당길 쉬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물레를 돌림에 따라 도르레에 연결된 끈을 통해 물체가 위로 들어올려지도록 한 것입니다.

"이제 시험해 본 것을 예로 들어 말하면, 튼 돌 한 개의 무게가 만 이천근인데
불과 30명 밖에 안되는 장정으로도 아차하는 사이에 쉽게 힘이 쓰이어 한 사람 앞에 사백 근의 무게를 들게 된다. 그 들어올리는 힘의 능률이 이같이 큰 것이다."고 다산은 거중기의 능률을 설명하였습니다.

사실 도르레는 오래전부터 사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사찰에서 큰 불화를 걸어 올릴 때 긴 장대 끝에 도르레를 달아 한쪽에서 끈을 잡아당겨 그림을 들어올리기도 하고 궁전건불에서 문앞에 발을 치고 발을 들어 올릴 때도 도르레를 설치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다만 이때는 도르레를 한 개만 이용하였습니다.

다산의 경우, 그 창의성이 높이 평가되는 것은 기존의 도르레를 하나가 아니고 도합 8개를 위 아래로 연결하여 힘을 배가시키고자 한 점입니다.

또 도르레에 연결된 끈을 다시 물레에 감아 단순히 잡아당기는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끈을 물레에 감음으로 해서 힘을 배가 시키도록 장치를 생각한 점입니다.

18세기 조선 사회에서 성곽공사에 도움이 되기 위해 이런 기구를 새롭게 고안하였다는 사실은 당시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정약용의 가장 큰 후견인은 정조였습니다.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큰 환란이 없었지만, 1800년에 정조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다산 정약용도 정조 사후에 완벽히 정계에서 배제되고 잊혀져 갔습니다.

사실 정약용은 관직에 나간 지 2년 만에 당색(黨色)으로 비판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가 해미에 유배되었으나 정조의 배려로 열흘 만에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승하한 이듬해 1801년(순조 1) 신유사화가 일어나면서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인 정약종도 참수를 당했습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은 그해 2월에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11월에는 강진으로 옮겨졌습니다.
18년 동안 긴 강진 유배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다산시문집] 제4권에는 정조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노래한 정약용의 시가 전해집니다.
빈소를 열고 발인하는 날 슬픔을 적다[啓引日述哀]

운기(雲旗), 우개(羽蓋) 펄럭펄럭 세상 먼지 터는 걸까 홍화문(弘化) 앞에다 조장(祖帳)을 차리었네
열두 전거(?車)에다 채워둔 우상 말(塑馬)이 일시에 머리 들어 서쪽을 향하고 있네
영구 수레(龍?)가 밤 되어 노량(露梁) 사장 도착하니 일천 개 등촉들이 강사(絳紗) 장막 에워싸네
단청한 배 붉은 난간은 어제와 똑같은데 님의 넋은 어느새 우화관(于華館)으로 가셨을까
천 줄기 흐르는 눈물 의상(衣裳)에 가득하고 바람 속 은하수도 슬픔에 잠겼어라
성궐은 옛 모습 그대로 있건마는 서향각 배알을 각지기가 못하게 하네
([다산시문집] 제4권, 시)

행복한 삶을 위하여..

유배 생활 처음에는 천주교도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천주교인이라는 소문으로 나자 모두 정약용을 모른척했으며, 유배지의 어려움 속에서도 승려 혜장(惠藏) 등과 교유하였고, 제자들을 키우며 저술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강진에 도착해서 처음 머무른 곳이 사의재
(四宜齋)라는 동문 밖 주막에 딸린 작은 방이었습니다.
그곳에 기거하면서 예학 연구를 시작하였고,
이후 고성사(高聲寺)의 보은산방(寶恩山房)과 목리(牧里)의 이학래(李鶴來) 집으로 전전하면서 연구에 전념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808년 귤동의 ‘다산초당'에 자리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천여 권의 서적을 쌓아 놓고 유교 경전을 연구하였습니다. 그의 이른바 주석 학문인 경학
(經學)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선생이 61세 되던 1822년에 자신의 생애와 사상, 업적을 묘지명이라는 문체를 빌어 사실대로 적은것이 자찬 묘지명입니다. 문집에 넣기 위한 집중본과 무덤속에 넣기 위한 광중본이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묘지명은 집중본의 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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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인 마현으로 돌아온 것은 1818년 가을, 그의 나이 57세 때였습니다.

57세에 해배되어 1836년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고향인 마현에서 자신의 학문을 마무리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습니다. 해배되었다고는 하나 오랜 기간 지냈던 강진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자신이 지은 많은 저술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읽히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
다.

초로의 나이에 더 이상 관직에 나갈 수 없었던 다산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저술들을 널리 소개하여 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경세(經世)의 길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자신의 호를 다음 시대를 기다린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즐겨 사용한 것 역시 그런 의미였습니
다.

그는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서 자신의 저술에 대해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는 자신을 수양하는 것이고, 일표(一表)와 이서(二書)는 천하와 국가를 위함이니, 본말(本末)이 갖추어졌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
다.

육경과 사서에 관한 저술이 근본이라면,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흠흠신서(欽欽新書)]는 경세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었던 것입니
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약용은 자신의 저서 [경세유표]를 후대에도 계속해서 갈고 닦아야 할 ‘초본’이라 했습니다.
그가 펼친 국가개혁사상은 사후에도 계속해서 재해석되고 재창조되는 생명력을 가진 근대적 사상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다산의 저술활동은, 물론 다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제자들과의 공동작업이라는 성격이 강했습니다.
다산의 많은 저서에는 공저자의 이름이 표기되어 있는데, 그러한 표기가 없는 경우에도 공동저작이 대부분입니다.

예컨대, [목민심서]는 정용편(丁鏞編)으로 되어 있는데, 저술의 체계를 잡고 조목마다 편자의 의견을 붙이는 일은 다산 스스로가 행했지만, 각종의 전적(典籍)에서 자료를 수집·분류할 뿐만이 아니라 다산의 구술을 기록하고
정서(精書)·제책(製冊)하는 일은 모두 제자들이 담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48권 16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목민심서]가 단 1년 이내에 저술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정약용이 가진 국가개혁의 목표는 부국강병이었습니다.
국가개혁사상이 집대성되어 있는 [경세유표]에서 그는 경세치용이용후생이 종합된 개혁사상을 전개하였습니
다.
정약용의 개혁안은 장인영국(匠人營國)과 정전법(井田法)을 중심으로 한 체국경야(體國經野)라 평가할 수 있습니
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통치와 상업, 국방의 중심지로서의 도시건설(체국)과 정전법을 중심으로 한 토지개혁(경야)을 바탕으로 세제, 군제, 관제, 신분 및 과거제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도를 고치고,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 개혁안의 주요 골자입니다.

[주례(周禮)]의 체국경야 체제를 기본 모형으로 삼아 조선후기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상공업의 진흥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자 한 것입니
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회갑을 맞은 1822년 다산은 인생을 정리하면서, 자신의 장지를 정하고, 스스로 묘지명을 짓습니다.
별호도 후대를 기약한다는 뜻의 ‘사암(俟菴)’을 사용합니다. 그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은 기존 저술에 대한 종합과 문집의 편집으로 나타났습니
다.

[자찬묘지명]에 따르면, 그의 저작은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으로 모두 499권에 이르는 방대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별세할 때까지 15년 동안 그는 [매씨상서평]을 개정하거나, [상서고훈]과 [상서지원록]을 개수하고 합편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으로 정리하는 등 저작에 대한 분합, 필삭, 윤색에 온 힘을 기울여 182책 503권의 가장본 [여유당집
]을 완성하였습니다.

아들 정학연은 추사 김정희(金正喜)에게 [여유당집]의 교열을 부탁했으며,
1883년(고종 20)에는 왕명에 따라 [여유당집]이 전사되어 내각에 수장되었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정약용은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의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가 태어난 마현은 한강의 상류로 풍광이 매우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나 있었으며,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세 이전에 이미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습니다.
어린 정약용이 눈썹이 세 개밖에 없다는 뜻으로 큰 형 약현이 '삼미집'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어릴 적 스승은 부친이었습니다.

10세 나이에 경사(經史)를 읽기 시작하고, 16세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읽었다.
마현에 터를 잡은 그가 서울 출입을 하게 된 것은 그의 나이 15세에 서울 회현동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들면서부터입니다.

본격적인 입신의 생활은 20대부터였다. 22세에 초시에 합격하였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교유 관계를 넓혔습니다.

성균관 재학 시에 이미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28세에 마지막 과거시험인 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하여 벼슬길로 나갔습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약용은 23세에 이벽(李蘗)으로부터 서학(西學)에 관하여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서학에 심취했던 과거로 인해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정약용은 20대 초반에 서학에 매혹되었지만, 이후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딪혀 끝내는 서학에 손을 끊었다고 고백했지만,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습니다.

천주교 문제가 터지기 전,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습니다. 정조의 최측근으로서, 관직은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부터 출발하여 가주서(假注書), 지평(持平), 교리(校理),
부승지(副承旨) 및 참의(參議) 등으로 승승장구하였습니다.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起重架) 설계 등 빛나는 업적도 많았습니다. 한때나마 외직으로 내몰리기도 했으나 좌절하지 않고
고마(雇馬庫) 개혁, 가좌부(家坐簿) 제도 개선, [마과회통(麻科會通)] 저작 등 훌륭한 치적을 남겼습니다.

정약용은 가장 이상적인 관료가였습니다. 배다리와 기중가의 설계에서 이미 재능을 펼쳤지만, 그의 저작에서 엿보이는 정치관은 기본적으로 민본(民本)이었습니다.
정약용은 왕정시대에도 주민 자치가 실현되기를 소원한 인물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한때는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라 불리던 곳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재마을에 들어서면 일단 옷깃부터 여미게 하는 경건함이 느껴집니다.

덕소에서 팔덩을 거쳐 양평으로 가는 6번국도를 따라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양수리 못 미쳐 능내리에 닿게 됩니다.

능내리라는 지명은 세조 때 좌의정을 지낸 서원부원군 한확의 묘가 있어서 능안 또는 능내라고 한데서 유래합니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두물머리 건너편에 자리잡은 능내리는
조선의 인물들 중 가장 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닐 자산 정약용(1762~1836)의 흔적을 오롯이 되살려놓은 고향이자 성지입니다.

다산정약용의 생가와 묘역, 사당, 기념관과 문화관, 실학박물관 등으로 다산유적지를 만들어 놓은 곳입니다.

행복한 삶을 위하여..

다산 정약용은 75년의 일생 중 18년을 전남 강진의 유배지에서 보내면서 누구보다도 고향을 그리워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자신이 태어난 고향집에서 눈을 감을때도 "지관에게 물어보지 말고 딥 뒷산에 묻어라"고 유언했다고 하니 그의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이 묻어나는 느낌입니다.

다산 정약용은 인간 본성이나 아름다운 자연과 같은 전통적인 서정을 외면한것이 아니고,
다산이 경계한것은 세상을 향한 눈과 귀는 닫아둔 채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유아독존의 태도였던것 같습니다.

실제로 다산은 젊은 날의 포부, 백성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 유배생활에서의 고통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 내적심성의 내밀하고 감성적인 다양한 시들을 연보처럼 남겼습니다.
특히 전 생애를 통틀어 보이는 자연을 소재로 한 시편들은 그의 육체와 정신을 올곧게 성장시켜준 마재마을에 대한 헌사였습니다.

봄날 한강에 배를 띄우고 수석동 미음나루를 거쳐 마재마을 소내로 돌아가는 [배타고 소내로 돌아가며]라는 詩나 강변마을의 풍경을 읇은 [어촌을 지나며]세속을 초탈한 말년의 풍류가 엿보이는[못가에서] 등은
다산의 마음을 대변하는듯 합니다.

다산정약용은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부인과의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시(회근시
)를 마지막으로 그의 삶을 마치게 됩니다

눈 깜짝할 새 예순 해가 지나가니
복사꽃 화사한 봄빛 신혼 때와 같네
살아 이별 죽어 이별 늙음을 재촉하나
짧은 근심 긴 기쁨은 임금닌 은혜로다.
오늘밤 뜻 맞는 이야기 새삼 즐겁고
그 옛날 하피첩엔 먹 자국 남았는데
떨어졌다 다시 만난 내 모습 같은
합환 술잔 남겨두어 자손에게 주리라

행복한 삶을 위하여..

물질적 토대로부터 정신문화에 이르기까지 들썩거리며 변해가는 현실속에서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의 마재마을은 다산의 실학이 움을 틔운 요람이자 아름다운 이상향을 갈구한 실학자이자 시인의 안식처였습니다

그 옛날 다산이 그랬던것 처럼 공원으로 조성된 초천나루 강변을 걷다보면
올 곧게 한 세상을 살다 간 한 시인의 향기을 느낄 수 있는것 같습니다.

다산의 정기와 역사의 향기가 배여나오는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는 참된 시인의 고향이고 안식처인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