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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고난은 나의 고난”

뛰노라면 2010. 1. 15. 12:01

.민족의 고난은 나의 고난”

1962.01.05~01.06

비원의 키워드 ‘민족주의’  
 

교향악단 지휘를 위해 일시 귀국한 애국가 작곡가 안익태를 접견했다. 1961-01-05. (박정희대통령전자도서관)

한국인 최초의 세계적 지휘자 안익태. 일생을 조국을 떠나 방랑하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기에 강렬한 민족주의 비원(悲願)이 애국가와 ‘한국환상곡’을 탄생시켰다.

일제치하의 1936년 8월9일, 제11회 베를린올림픽의 하일라이트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1위로 경기장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관중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 스탠드 한쪽에서는 난데없는 노래소리가 울려퍼졌다. 너댓명의 재독 동포를 앉혀 놓고 한 조선 청년이 열광적으로 지휘봉을 흔들고 있었다.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노랫말은 거의 울음소리로 바뀌고 말았다.
지휘봉을 휘두른 조선 청년이 바로 안익태요, 이때 동포들이 불렀던 노래 ‘조선응원가’가 이 세상에 처음 불려진 우리 애국가였다.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
이것이 대한민국의 공식 애국가로 지정된 것은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그러나 스페인에서 살고 있던 안익태가 이 사실을 안 것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였다.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라디오 뉴스와 함께 울려퍼진 애국가가 바로 자신의 곡임을 알고는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안익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편지를 띄워 “이 애국가는 본인이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본인은 다만 하느님의 영감(靈感)을 대행했을 뿐입니다”라고 했다.


결승점을 향해 전력질주하는 손기정. (연합뉴스 포토DB견본)

활달한 성격의 손기정은 베를린올림픽 기간 내내 선수촌 안팎에서 외국인이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으면 “KOREA에서 왔다”라고 대답했다. 각국 기자 및 관람객들의 사인 요청을 받으면 ‘손긔정’ 옆에다 ‘KOREA’라고 적고 한반도 지도를 그려넣었다.
마라톤에 우승한 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들이 서명하기로 되어 있는 독일의 국빈 방명록에도 ‘손긔정’이라고 한글로 뚜렷이 적었다.
일제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 조선인이 자신의 국적을 KOREA라고 표기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손기정기념재단)

“우리의 민족성으로 볼 때나 또는 지정학적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이어받은 것은 내부적 빈곤과 외부적 압박에서 오는 수난의 역사였다. …나라를 지켰다거나 잃었다 해도, 민족문화를 향상시켰다거나 후퇴시켰다 해도, 한국 역사라는 지구의 일각에 쌓인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이며 한국 국민이고, 수난의 역사에 대한 책임은 종국적으로 당시의 우리나라 지도자들에게 있었다.” (박정희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극동의 얼굴’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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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캘리포니아대학의 로버트 스칼라피노 교수를 접견. 1962-01-06. (정부기록사진집5)

1962년 새해 박정희 의장을 면담한 스칼라피노는 “그가 정직하고 근면한 육군장성이라는 인상을 받았다”며 “한국 군사정부가 '단시일내에 군정을 끝마친 버마 군사정부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고 논평했다.

“그는 미군이나 유엔군 장교들과 골프를 한번도 치지 않은 한국 군인이다. 그는 별명을 갖지 않은 사람이요, 검은 안경 뒤에 감추어진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이 ‘전형적인 한국인’이야말로 이제 우리가 상대하지 않을 수 없는 극동의 얼굴인 것이다.” (AP통신)

외국의 시각은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 장군’만을 주목할 뿐, 그가 목숨을 건 혁명을 왜 했으며, 어떻게 조국의 운명을 바꾸려 하는지를 헤아리는 데 인색했다.
식민지시대와 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한 조국, 외국 원조에 의존해 살아온 민족의 고난을 박정희는 그 자신의 고난으로 부둥켜안았다.
5.16혁명은 온갖 불행, 악운, 설움, 가난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빅뱅’이었고, 박정희는 국민의 절대적인 지지와 통합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우리도 한번 사람답게 살아보자는 한맺힌 열망의 민족주의, 바로 이 국민통합의 키워드로 그는 군사혁명을 국민혁명으로 업그레이드시켜 나갔다. (*)

열려라, 대한민국③

박정희 패러다임, 힘찬 시동

1962.01.05

“밥 먹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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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교실 풍경. 담임 교사가 옥수수죽을 끓여 나눠주고 있다. 경북월성군 하강초등학교. (경북도청)


 
밀가루 배급. 1962. (전남도청)

“(1950년대에) 박정희 중령은 처음 만난 자리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면서 ‘가난과 전쟁으로 찌든 이 나라를 송두리째 뒤바꿔야 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김용태, 월간조선 2002년 4월)
모진 가난이었다.
전쟁의 폐허 위에서 미국의 원조물자를 얻어 먹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고 영양실조는 다반사였다. “밥 먹었냐?” “아침 드셨습니까?”하는 말은 오랜 가난의 부대낌 속에서 무사한지를 묻는 인사로 굳어졌다. 나날을 ‘먹는 걱정’으로 살고 지고 했다.
배고픈 국민에게 세끼 밥을 먹이기 위해 등장한 박정희 혁명정부.
“우리는 돼지가 아니다. 인간이 밥만 먹고 산단 말이냐?”
아직도 박정희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시공(時空)의 혼돈 속을 몽유(夢遊)하고 있다.
무엇이 구국인가. 누구를 위해 정치는 존재하는가. 
“사람이 굶어 죽어갈 적에는 그 사람 앞에서 복지정책이 어떻고 저떻고 그런 얘기는 다 소용없죠. 우선 먹여서 살리는 길이 그 사람을 가장 위하는 길이고, 중병이 들어 수술을 해야 할 사람에겐 당장 수술을 해주는 것이 그 사람을 위한 최선의 길이죠. 또 출혈이 심하다 하면 아무리 좋은 옷이라 해도 찢어서라도 지혈을 시켜서 사람 살리는 일이 가장 최선의 길인데 나라가 없어지는 판에 민주주의를 중단시켰다 하는 얘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는가, 이해가 안됩니다. 나라가 있어야 민주주의도 있는 거니까” (박근혜, MBC-TV 박경재의 시사토론 1989년 5월19일)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시행하는 1962년 첫해,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은 가난의 편에 서서 나라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배고픈 국민에게 밥 먹여 주려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정치인들만의 정치, 대책없는 가난 속 무능하고 몽매한 후진 정치의 허위의식과 위선을 제압하고, 오직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집념으로 구국의 길을 달려갔다.

첫째도 경제, 둘째도 경제, 셋째도 경제
 

신년 시정방침 발표. 1962-01-05. (박정희대통령전자도서관)

박의장이 처음 발표하는 신년 시정방침에 온국민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1월5일 박의장은 “한국경제발전의 적극적인 목포를 공업화에 두고 금년은 이 공업화를 위한 기반을 구축할 것이며, 기간공업과 전력, 석탄. 농수산업 부문에 주력하고 화학비료, 시멘트, 종합제철, 정유 등 건설에 착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자원, 무자본, 무기술의 3무. 싹이 보이지 않던 나라경제가 박의장의 일사불란한 지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는 군정 기간에 외국방문 등 특별한 일이 아니고는 군복 차림을 했다.

톱다운으로 다운업을 끌어내는 ‘박정희 패러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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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기획원 순시. 1962-01-05. (정부기록사진집5)

5일 상오 송요찬 총리를 대동하고 경제기획원을 순시, 업무전반에 관하여 보고를 들었다.
경제기획원이 5개월여 작업 끝에 탄생시킨 대한민국 경제발전의 청사진이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다.
기본목표는 원조 의존적인 소비경제를 청산하고 자립경제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재무부 순시. 1962-01-05. (박정희대통령전자도서관)

5일 하오 재무부를 순시한 자리에서 박의장은 “재무부 관하 금융기관이 구태의연하다는 일반의 비난을 듣고 있으니 정신을 차려야 하며 세무서원 가운데 옛날과 같은 비행이 있다면 이는 국가경제에 해로운 것이니 이를 철저히 감독하여 예방하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박의장은 “관재업무를 철저히 하여 정부세입의 부실을 방지하고 특히 유휴 국유재산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 활용 방법을 찾으라”고 강조하고 “전매청 여공들의 건강을 위하여 방독면경을 만들어 주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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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행 순시. 1962-01-05. (정부기록사진집5)

한국은행에서는 유창순 총재로부터 업무에 대한 보고를 들은 다음 “은행원은 은행의 이익이나 편리에 앞서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하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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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시찰. 1962-01-05. (정부기록사진집5)

“그때 경제도 지금하고는 비교가 안됩니다. 완전히 파탄에 이르러 밀수가 횡행했죠. 아버지가 5.16 일어나기 며칠 전에 백화점에 양말하고 내의를 사러 가셨더니 전부 일제, 미제, 홍콩제만 내놓더래요. 그래서 국산은 없느냐고 하니까 저 구석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는 것을 상점주인이 꺼내오면서 '국산이 있긴 하지만 이걸 어떻게 쓰겠느냐'고 차라리 외제를 쓰라고 하더란 얘길하신 걸 기억하는데 경제가 그런 지경이었죠. (박근혜, MBC-TV 박경재의 시사토론 1989년 5월19일)

국가권력과 국민의 고난을 함께 움켜쥔 박정희.
혁명정부는 그의 책임하에 국가 주도형 개발전략을 채택했다. 그러나 경제는 지시와 명령이 아니다. 경제는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붙는 재화이며 가치다. 박정희가 주도하는 톱다운 경제개발은 국민을 일으켜세우는 경제, 다운업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한국주식회사’로 불리는 국가주도의 성장모델은 오늘날 세계11위의 한국 경제를 이룬 모태가 되었고,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이 ‘박정희 브랜드’로 불리게 된 연원 또한 1962년, 야심찬 경제개발을 본격 추진한 그때부터 비롯된다. (*)


열려라, 대한민국②

허허벌판에 근대화의 불을 지피다

1962.01.02~01.04

황량한 벌판에서 근대화혁명의 횃불을

상공에서 내려다본 울산 벌판. 최초로 공업센터가 들어설 곳이다. 박정희 혁명정부는 허허벌판에서 조국근대화의 첫 횃불을 밝혔다. (울산광역시 홈피)


울산 장생포항의 고래. 고래 파시(波市)에 흥청대던 장생포항의 야성(野性)은 공업입국의 야망으로 바뀌게 된다. (울산광역시 홈피)

1962년 1월2일 육군 경비행기 ‘비바’가 울산 상공을 가르고 있었다.
기내에는 박정희 의장을 비롯한 김종필, 김용태 등 혁명정부 요인과, 그리고 이병철(전경련 회장), 이정림, 정재호, 남궁련, 김주인 등 경제계를 대표하는 기업인들이 동승해 있었다.
이들은 눈 아래 펼쳐진 울산군의 황량한 벌판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공업센터가 들어설 곳이다.
정초의 휴식도 없었다. 그만큼 울산공업센터 건설은 혁명정부와 기업인 양자에게 시급한 과제였다.
잡초가 우거진 허허벌판에 공장들을 줄줄이 세운다는 것은 일찍이 없던 아득한 꿈만 같은 일이었다. 그런 일을 자청하고 나선 쪽은 기업인들이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구국의 혁명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열망으로 들끓었고, 기업인들은 호응하지 않을 수 없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다. 이병철 등 기업인들은 5.16혁명 이전 민주당 정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막대한 환수금을 물어야 할 처지에 있었다.
박정희 의장은 부정축재액을 몰수하거나 이들을 감옥에 보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경제의 흐름을 죽여서는 국가적으로 이로울 게 없는 것이다. 대신 채찍을 들었다. 경제재건의 공을 세워 부정축재의 불명예를 벗으라는 것이었다. 공장을 짓겠느냐 아니면 감옥에 가겠느냐 하는 선택을 강요하듯 채찍은 무서웠지만, 그러니 말에게 채찍을 때리는 것은 올바른 방향으로 잘 달리게 하고자 함이지 말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다.
이병철 등은 그래서 공장을 건설해 부정축재액을 주식으로 헌납할 수 있도록 3년을 유예해 달라는 요청과 함께 공장건설 후보지를 울산으로 지정해 줄 것을 건의했던 것이다.
울산 벌판을 둘러본 일행은 인근 여관방에서 떡국을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였다.
“거창한 계획을 추진하려면 자본과 기술이 있어야 하는데 걱정이군요. 그러나 여러분이 이처럼 의욕을 보여주시니 기필코 성공하리라 믿습니다.”
박정희 의장이 말했다.
기업인들은 초라한 음식상을 마주하고 앉은 박의장의 일거수일투족 앞에 긴장감을 풀지 못했다.

조국근대화의 테마도시’ 울산을 탄생시킨 주역 3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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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로부터 박정희 의장,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 밴플리트 장군.

1962년은 박정희 혁명정부의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첫해, 즉 조국근대화의 원년이다.
1월1일, 2일 이틀에 걸쳐 경향신문에 게재된 ‘신춘 경제 좌담회’ 제하의 기사를 보면 이병철이 재계 대표로 나와 혁명정부의 경제개발계획에 대해 “더 큰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경제개발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큽니다. 외자는 기업가들이 앞장 서서 도입하겠습니다”라고 강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당시 기업인으로서 국제금융시장에서 스스로 차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병철의 의욕은 혁명정부의 강력한 경제개발 의지에 힘입은 것으로 ‘국가보증’이라는 전제조건이 있었다. 
이병철 등 전경련의 기업인들은 1961년 외자 유치를 위해 미국에 갔었지만 한푼도 성사된 것이 없었다. 대신 한국전쟁 참전 사령관이었던 밴플리트 장군이 이들을 호의적으로 도왔다. 밴플리트는 이병철 등을 미국 실업인들에게 연결시켜주어 공업단지 건설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을 수가 있었고, 박정희 혁명정부의 확고한 의지로써 공업센터 건설의 프로젝트가 마련되면 그때 가서 차관을 제공할 용의가 있다는 언질을 받고 돌아왔었다. 
그리하여 울산이 공업센터 건설의 최적지로 선정된 것은 첫째 태화강, 화야강 등에서 비용을 적게 들이고 공업용수를 공급받을 수 있고, 둘째 부산항과 가까워 국제적인 교류가 수월하며, 셋째 휴전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전쟁의 피해가 적었던 만큼 안보적으로 유리한 위치라는 점 때문이었다.
문제는 공업센터 건설 자금이었다. 이후 울산은 미국 정부의 도움이 아닌, 밴플리트 장군의 적극적인 역할에 의해 경제건설의 테마도시로 변모하게 된다.

근대화혁명 원년의 시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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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재건최고회의 시무식. 1962-01-04. (박정희대통령전자도서관)
현재의 문화관광부 건물이 당시의 정부 청사였다. 이 건물도 필리핀 건설회사의 감리를 받아 지어야 할 정도로 기술과 자금 사정이 열악했다.  

1월4일의 정부 시무식에서 박의장은 “금년은 국가 운명을 좌우하는 경제재건의 해”라며 근대화혁명의 출발을 선언했다. 최고회의 요원과 직원 전원이 참석한 자리에서 박의장은 “최고회의는 혁명과업 완수를 역사 앞에 책임진 혁명정부의 심장부”라고 말하고 “최고회의 직원은 ①혁명공약이나 정책수행 등에 국민보다 앞서 솔선수범 해야 한다. ②국가에 대한 봉사정신을 철저히 하여야 한다. 국가의 이익을 먼저 하는 나라는 흥하고 사리와 사욕을 먼저 하는 나라는 망한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③특권의식이나 월권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직원들이 월권행위를 할 때는 일반국민보다 더 크게 책망하겠다. 특권의식은 혁명의 정신방향에 역행하는 행위이다”라는 내용의 훈시를 했다.

한편, 이날 혁명정부는 울산공업센터 건설계획을 확정지음으로써 공업센터 부지인 경남 울산군 울산읍과, 방어진읍 대현면, 하상면 등을 포함하는 울산지구 173㎢를 특정공업지구로 결정하고, 그해 5월 행정구역을 변경하여 울산시로 승격하였다.

1월4일 이날, 최고회의 공보실은 서독 아데나워 수상이 “한국의 경제개발을 원조할 최대의 준비가 되어 있다”는 내용의 친서를 박정희 의장 앞으로 보내왔다고 발표했다. 이는 전해인 1961년 11월 외자유치를 위해 서독에 간 정래혁 상공장관 편에 전했던 박의장의 친서에 대한 회신이었다. 아데나워는 친서에서 “본관은 정장관과의 회담이 양국가를 위하여 만족스러운 결과를 가져왔음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국의 경제발전에 대하여 우리는 한국정부를 원조할 최대의 준비가 되어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우리 양국간은 세계평화와 자유를 수호하는데 이와 같은 방법으로 기여할 것임을 확신하는 바입니다”라고 함으로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착수한 박정희 혁명정부에 낭보를 전해주었다.

울산공업센터 건립이 가능했던 데는 밴플리트 장군의 도움이 전적으로 작용했다. 그것은 한국전쟁의 참상과, 그리고 폐허 위에서 가난을 벗어나고자 하는 한국인의 한맺힌 소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밴플리트 장군의 전우애였다. 그리고, 같은 분단국의 처지에 있던 서독 정부의 지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한국의 박정희 정부는 대일(對日) 수교 이전 고립무원의 곤경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울산공업센터가 들어서게 된 당시의 울산 인구는 18만, 서쪽의 밀양은 23만이었다. 그러던 울산이 대한민국의 산업화시대를 선도하면서 오늘날 110만 인구에 국세만 10조원을 내는 대단위 공업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


1961년의 박정희 의장 가족 모습


장충동 의장 공관 앞뜰의 5인 가족. 1961. (국가기록원)

의장 공관은 뜰이 넓어서 가족이 함께 사진 찍기에 좋았던 듯, 이 시절 다른 장소에서 찍은 가족사진은 보이지 않는다. 신당동 집에서 공관으로 이사한 것이 1961년 8월이므로 그해 초가을 무렵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근혜(10세), 근영(8세)은 장충초등학교 재학중. 


위 사진과 잇따라 찍은 장면. 1961. (국가기록원)

밖에선 늘 군복 차림이었던 박의장이 모처럼 양복을 입고 있다. 육여사는 양장이 어색해 보일 정도로 신혼 때부터 한복을 평상복으로 입었다.


아들에게 장난을 거는 아버지. 1961. (국가기록원)

이상 세 컷의 사진을 보면 아버지가 막내에게 포인트를 맞추는 모습이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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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케이크를 자르는 박의장. 1961-11-07. (정부기록사진집5)

육여사와 지만(우측 두번때) 외의 두 사람은 공관 근무자들로 보인다.


피아노 앞의 근혜, 근영 자매. 1961-12-03. (정부기록사진집5)

수수한 겨울 옷차림에서 자녀를 남다르지 않게 키우려는 육여사의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 있다. 자녀들은 늘 귀가가 늦는 아버지의 얼굴을 못 보고 지내는 날이 많았다.


쌍권총을 든 ‘웨스턴 꼬마’ 박지만. 1961-12-03. (정부기록사진집5)

케네디 대통령이 준 선물이다. 3남매는 어머니의 엄한 교육 지침 때문에 이렇다 할 장남감이 없었는데 박지만이 난생 처음 ‘횡재’를 만난 셈.

“어머니가 저희들을 키우며 가장 신경 쓰신 일 중의 하나는 행여 대통령의 자녀라는 특권의식이나 우월감을 갖지 않을까 하는 것이셨죠. 그래서 저희들은 남보다 좋은 장난감이나 학용품을 가져본 기억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버지보다 훨씬 엄한 분으로 기억되는 것은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박근혜)

●포토 박정희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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